▲ 지난 97년 12월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왼쪽서 두번째) 가미셸 캉드쉬 IMF총재(오른쪽)가 배석한 가운데 기자회 견을 하고 있다. | ||
지난 10월 초 서울대와 미국 스탠퍼드대가 공동 주최한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서울 삼성동 코엑스 세미나장의 분위기는 무거웠다.이날 세미나 주제발표에 나선 정운찬 서울대 총장(경제학)은 “최근 개선된 경제지표는 구조조정으로 경제가 강해졌다기보다 단기적인 재정확대와 근시안적인 경제정책에 따른 일시적 회복”이라고 주장했다.그는 이어 “올바른 경제정책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이 시점에서 볼 때 향후 한국경제에 조그만 충격이라도 가해지면 위기가 재발할 것임이 명백하다”고 경고했다.
이날 세미나는 최근 부동산경기 과열, 과소비 심리재발 등으로 흥청거리고 있는 한국 경제의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비관적인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섣부른 ‘위기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위기의 경고음은 급증하는 단기외채, 한국은행 총재의 인플레 경고, 가계부채 급증, 전문가들의 잇딴 구조조정 실패론 제기 등에서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한국 경제에 드리운 가장 큰 먹구름은 무엇보다도 최근 들어 97년 환란의 주범으로 꼽혔던 단기외채가 급증하는 현상이 다시금 재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단기외채란 만기 1년 미만의 외화부채로, 이자율이 높고, 만기일이 짧아 이를 잘못 관리할 경우 외환 유동성 위기를 불러온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는 대부분 단기부채가 급증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지난 97년 말 외환위기 사태 때 우리나라의 총부채 중 단기외채의 비율은 39.9%. 그런데 지난 7월 말 기준 단기외채 비율이 43.9%로, 비율만 놓고 보면 환란 당시의 상황을 능가하고 있다. 단기부채의 급증현상은 또다른 경제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우리나라의 총외채 규모는 1천2백91억달러. 재경부가 지난 9월 초 발표한 7월 말 기준 수치이다. 이는 지난 3월 1천1백95억달러에서 5개월 만에 96억달러(11조5천2백억원)나 늘어난 것.
총외채 중 단기차입이 지난 6월에는 31억7천만달러가, 7월에는 28억4천만달러가 증가했다. 이는 금융기관의 단기차입이 급증해 전체 단기외채 규모를 크게 늘렸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위기 상황이던 지난 97년 말 39.9%까지 치솟았던 단기외채 비중이 지난 98년 말에는 20.6%까지 떨어졌으나, 이후 다시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재경부에선 단기차입 급증 현상이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단기차입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외국은행 국내지점의 영업확대에 따른 차입증가와 최근 국가신용등급 상향으로 기준 금리가 떨어지면서 국내은행들이 금리가 비싼 중장기 차입금을 금리가 싼 단기차입금으로 돌리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 정운찬 서울대 총장 | ||
이 관계자는 또 “지난 97년 말 단기외채가 외환보유고의 7.2배에 달해 환란을 초래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지난 7월 말 기준으로 단기외채 대비 외환보유고 비율이 43.9%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다른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 대신경제연구소 김영익 실장은 “최근 경상수지가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데다, 내년에는 경상수지 적자가 날 가능성이 높아 단기외채 문제를 가볍게 볼 상황은 아니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 7월 경상수지는 적자가 났다가 8월에는 흑자로 돌아섰지만 세계경제 전체가 장기 불황조짐을 보이는 등 불투명해지고 있어 안심할 처지가 못된다는 것.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설 경우 단기외채 문제는 우리 경제의 발목을 다시 붙잡는 화근이 된다는 주장이다.
한국 경제의 최근 흐름이 저금리를 이용한 과도한 내수확대로 몰리면서 거품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도 우려의 요인이다.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 9월 ‘상반기 기업실적 호조의 허실’이란 보고서를 통해 “올해 상반기에 국내 기업들이 17조원의 사상 최고 순익을 기록했지만 매출 신장률이 낮아지고 있어 장기적 성장 가능성은 의문시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의 높은 경영성과는 그간 쌓아논 곳간을 비움으로써 나타난 착시현상일 수 있고, 질적 측면에서 보면 사상 최대 수익이 매출 신장이 수반되지 않은 것이어서 성장 추진력 약화가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발생시킨 수익의 대부분이 영업력 강화나 경영혁신 외에 환율 등과 저금리의 덕을 본 것이어서 ‘사상 최대의 실적’이란 허상은 착시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삼성경제연구소는 “올 상반기 기업실적을 외환위기 이전(1996년)의 환율, 금리 수준에 대비할 경우 17조원의 순익이 아니라 18조원의 적자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결국 현재 기업성적표는 환란 이후 금리하락과 환율 절상에 따른 착시 효과로 인한 ‘과장된 성공담’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또다른 위기요인은 부동산 경기 과열, 가계 신용 붕괴 우려 등이 저금리 문제와 맞물려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 부분이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9월29일 “저금리가 지속되는 가운데에도 물가가 안정돼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설비투자가 살아나면 물가상승이 불가피해 인플레 압력이 조만간 현실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 총재는 “시중에 과잉 유동성이 있다”며 “콜금리를 올린다 해도 금리 절대수준이 낮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금리인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문제는 금리를 올릴 경우 가계 신용대란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금융감독위원회와 한국은행이 금리인상의 당위성을 놓고 반대와 찬성으로 갈려 논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단기 외채 증가, 경상수지를 위협할 정도의 무역외 수지 적자 급증, 인플레 위험, 금리인상에 따른 신용대란 위험성 등 대선 정국을 맞는 우리 경제에 난제가 속출하고 있다. 다시 한국 경제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