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이 투신사 경영인이 전화로 싸운 것은 하이닉스 구조조정 문제를 둘러싼 채권은행, 투신사, 정부간의 깊은 갈등을 드러낸 단면이었다. 하이닉스는 현 정부가 안고 있는 가장 골치아픈 문제. 1998년 빅딜에서 시작된 하이닉스 문제는 현재 10조원이 넘는 부실을 안은 채 끝간데 없이 헤매고 있다.
마이크론 매각 추진 등 수없이 반복된 매각작업과 정부의 반강제에 의해 출자전환이란 이름으로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쏟아부은 채권단의 뭉칫돈. 2002년 11월 말 현재 하이닉스의 납입자본금은 26조원. 1998년 12월 5천6백94억원이던 자본금은 4년 만에 무려 50배 가까이 늘었다.
▲ 서울 대치동에 있는 하이닉스 반도체 서울 사무소 입주 빌딩. | ||
한국투신 등 수조원이 물린 투신권과 외환은행 등 채권은행단이 현재 맞서 있는 부분은 출자전환을 하는 방식. 투신권은 현재 주당 4백원대인 시가기준으로 하자는 것인 반면, 은행측은 채무 재조정을 통한 평가출자를 하자는 입장. 또 투신권은 출자전환 후 제한없이 주식을 매각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인 반면 채권은행 측은 일정기간 후 매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투신사들은 “출자전환 조건에서 즉시 매각이 가능하도록 처분에 대한 제한조건을 두지 않는 것인데, 외환은행 등 채권은행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태세”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채권단이 즉시 매도를 허용토록 요구하는 이유는 시가출자를 하더라도 주식매각이 원활치 못하면 많은 자금이 상당기간 묶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하이닉스가 당장 회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장차 기업의 존망을 가름할 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 실제로 하이닉스는 현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결자해지 차원에서 회생을 위한 여러가지 대안들을 모색하고 있지만, 정권이 바뀔 경우 새로운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뜩이나 주가하락으로 고통받고 있는 소액주주들과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리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투신사 관계자는 “출자전환 조건에 대해 물량 압박 등을 우려한 일부 소액주주의 반발이 있을 수 있어 고민이다”고 말했다. 특히 출자전환의 전제조건이 감자이고 보면 소액주주들은 주식이 줄어들어 막대한 손실을 떠안아야 한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대선이 끝난 뒤 신정부 차원에서 장기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기조정론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11월 말 현재 15개 투신 및 투신운용사가 보유한 하이닉스 채권은 총 1조2천5백13억원. 이중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곳은 한국투신운용이며, 전체의 32.6%인 4천76억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투신사들은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채권 중 절반 이상을 상각처리한 것으로 알려져 실제 보유 채권액은 절반 이하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이닉스 문제는 결국 정권 말기에 최대 과제로 다시 불거질 조짐이다. 게다가 미국 정부가 하이닉스 등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WTO에 제소할 뜻을 비치고 있어 이래저래 해결의 실마리는 오리무중이다.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