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의 심경이다. 올 초 아남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사업의 야망을 키워가고 있는 김 회장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자금 부담, 기를 못펴는 반도체 경기침체로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동부그룹 고위 관계자에 의하면 김 회장의 요즘 하루 일정은 채권 은행단 관계자 접촉과 해외 투자자 면담 등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는 것이다. 특히 채권은행 관계자들과는 신디케이트론 지원 등을 협의하기 위해 거의 매일 접촉중이다.
▲ 아남반도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반드시 성공 시켜 그룹을 한차원 높게 발전시킬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다. | ||
게다가 아남반도체를 인수하는데 소요된 자금으로 인한 자금사정도 아직 호전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자칫 악화된 자금난이 빠른 시일 안에 회복되지 않을 경우 계열사로 불똥이 튀어 그룹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김 회장을 중심으로 그룹 고위 경영인들이 연일 그룹 비상회의를 열어 대책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게 동부그룹 안팎의 전언이다. 현재 김 회장의 입술을 타들어 가게 하는 것은 당초 자금지원을 기대했던 채권 은행들의 태도가 비협조적이기 때문이다. 당초 자금지원을 약속했던 은행들까지 서로 눈치를 보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동부그룹 채권단 소속 A은행 고위 간부는 “인수를 만류했음에도 강행했으니 알아서 할 것”이라며 냉소적인 발언을 했다. B은행 간부는 사적인 의견이라는 토를 달았지만, “반도체사업을 해본 경험도 없는데, 무얼 믿고 수천억원을 대느냐.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만 죽어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여기에 최근 국내 신용평가회사들이 잇따라 동부그룹 계열사에 대한 신용평가를 하향 조정한 것도 가뜩이나 불편한 김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국내 3대 신용평가회사 중 한 곳인 한국신용정보(한신정)는 지난 12월6일 지분 출자와 지급보증 등 아남반도체에 직•간접적으로 재무지원을 한 동부건설, 동부한농화학, 동부정밀화학 등 동부그룹 3개 계열사에 대해 신용등급을 줄줄이 하향했다.
한신정은 이날 동부정밀화학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기존 ‘BBB-↓(하향검토)’에서 ‘BBB-’로 내리고, 신용 전망도 ‘부정적’이라고 밝혔다. 또 동부건설 기업어음에 대한 신용등급도 기존의 ‘A3↓(하향검토)’에서 ‘A3-’로 한단계 하향했고, 동부한농화학의 기업어음 신용등급도 기존의 ‘A3-↓(하향검토)’에서 ‘A3-’로 한단계 내렸다. 한신정이 동부 3사의 신용 전망을 하향한 가장 큰 이유는 ‘미래 현금 부족 우려’. 향후 이들 3개 기업은 자금부족에 따른 신용경색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반도체 경기에 대비하려면 아남반도체의 반도체 회로선폭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막대한 설비투자에 필요한 자금이 넉넉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인지 동부그룹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동부한농을 비롯한 동부정밀화학, 동부건설 등의 주가는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증시 전문가들도 아남반도체의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아남반도체의 불씨가 자칫 그룹 전체로 번지는 도미노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시각이 많은 듯하다. 전우종 SK증권 기업분석팀장은 “아남반도체에 대한 설비투자 규모가 매우 크지만, 자금줄인 계열사의 회사채 발행이 원활치 않아 자금난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동부그룹은 채권단으로부터 신디케이트론 도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채권단이 불투명한 태도로 일관하는 등 여건이 여의치 않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전 팀장은 “한신정의 이번 신용전망 하향은 좀 더 빨리 이뤄져야 했다”고 전제한 뒤 “현재 아남반도체가 갖고 있는 현금은 1천억원 가량으로 유동성 부채와 영업손실 등을 감안하면 앞으로 유동성이 안좋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반도체업계 전문가들은 동부그룹의 아남반도체 사업전망에 대해 엇갈린 입장을 보이고 있다. 아남반도체는 기존 동부전자의 주력 반도체 제품군을 다양화시키고, 영업력을 보강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비관적으로 보기만은 어렵다고 분석했다. 또 올 들어 회복국면에 접어든 세계 반도체 시장이 내년부터는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아남반도체의 주변상황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얘기.
그러나 다른 전문가는 동부그룹이 인수한 아남반도체의 경우 위탁가공(파운드리)이 주력이기 때문에 반도체 경기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 대만의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사와 유나이티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메이저 업체들이 공격경영에 나서고 있고, 중국 업체들도 저가 제품을 양산하고 있어 치열한 시장경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현재 아남반도체는 거의 전량을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의 주문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런 상황에 머물게 될 경우 아남반도체가 정상궤도에 오르기까지는 상당한 애로를 겪게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2002년 말 현재 세미컨덕터 매뉴팩처링이나 유나이티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가동률은 60~70%지만, 아남반도체는 이보다 낮은 50%에 불과한 점도 동부그룹이 해결해야 할 난제 중 하나다.
특히 수율 상승을 통한 비용절감을 위해서는 초미세 공법인 0.13미크론 및 0.11미크론 공정기술을 도입해야 하지만, 이를 위해 필요한 기술개발 자금 마련에 애를 먹고 있다. 시설확충과 기술개발을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그룹 계열사들이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계열사들 역시 ‘아남반도체 리스크’ 때문에 선뜻 투자결정을 내리기 어렵고 진단했다.
아무튼 김준기 회장은 주변의 만류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남반도체의 인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초 김 회장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인수에 따른 우려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그는 주변의 우려에 대해 “반드시 반도체 사업을 성공시키겠다. 반도체사업은 그룹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킬 것이다”고 맞받아쳤다.
한국자보(동부화재)와 한국비료 등 한 시대를 대표했던 기업들을 인수해 사업규모를 키워온 김준기 회장이 아남반도체라는 뜨거운 감자를 어떻게 요리할지 주목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