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내리막길을 걷다가 지난 1월부터 하락세가 가파르다. 시장조사기관 디램익스체인지(DRAMexchange)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기준 DDR4 8Gb(rlrkqlxm) D램 고정거래가격은 5.13달러로, 한 달 전보다 14.5% 떨어졌다. 1월의 17.24%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큰 하락폭이다. D램 가격은 두 달 동안 29.3% 떨어졌다.
하락세는 시장의 당초 예상보다도 빨랐다. 디램익스체인지는 연초 올해 1분기 D램 가격이 19.5% 떨어지고, 2분기에도 12.9% 내려간다고 예상했지만 이미 2월까지 30% 넘게 떨어졌다. 그동안 시장에선 하반기부터 가격 약세가 회복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최대 50%까지 떨어져 길게는 내년까지 유지될 것이란 관측이 최근 들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반도체 가격 급락에 따른 타격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회사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반도체가 지난해 국내 총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등 핵심 산업으로 분류되는 만큼 정부와 산업계 전반의 관심을 받는다. 올해 초 기획재정부 관계자들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잇따라 접촉하고, 비슷한 시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난해 말 세워둔 2019년 경영 계획을 일부 수정한 이유다.
정부는 시장 상황을 파악했고 두 회사는 경영계획에서 장비 입고 일정 등을 늦추는 등 제조와 직접 관련이 있는 장비 투자 속도를 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경력만 수십 년에 달하는 전문가들이 사실상 ‘플랜B’를 가동했다는 건 그만큼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충북 청주 SK하이닉스 반도체공장 M15 준공식 행사에 참석했다. 사진=청와대 제공
# “창고에 쌓아놓은 물건은 많은데 팔리질 않는다”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창고에 쌓여가는 재고가 주목받고 있다. 물건이 예상보다 더 안 팔리고 있다는 얘기다. 두 회사의 재고 문제가 최근 반도체 가격 하락세에 더 힘을 싣고 있다는 게 증권가와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재고는 매출이 증가하면 함께 늘어난다. 지난 2년 동안 두 회사가 역대 최대 매출 신기록을 연달아 갈아치운 만큼 재고가 쌓인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매출보다 재고가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를 보면, 삼성전자 매출은 2017년 239조 5800억 원에서 지난해 243조 7700억 원으로 1.7%늘었다. 이 기간 별도기준 재고자산은 2017년 말 7조 8371억 원에서 2018년 12조 4410억 원으로 58.7% 늘어 매출 증가율을 크게 앞섰다.
삼성전자와 함께 2년 연속 신기록을 세운 SK하이닉스 상황도 비슷하다. 매출은 2017년 30조 1094억 원에서 지난해 40조 4451억 원으로 34% 늘었지만, 재고자산은 2017년 2조 2247억 원에서 3조 7215억 원으로 67% 껑충 뛰면서 매출 증가 속도를 추월했다.
지난 2년 동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초호황’을 누렸던 점을 고려해도 재고가 많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두 회사는 갑작스러운 주문에도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재고를 늘려왔다”면서도 “시장 상황이 급변한 측면도 있지만, 예상보다 재고를 더 해소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반도체 가격 하락세가 가파르다. 사진은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고성준 기자
이 관계자가 언급한 ‘급변한 시장 상황’은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큰손’들의 수요 급감이다. 이 회사들은 지난해 3분기까지 인공지능 사업에 투자하고 클라우드 서버를 늘리면서 반도체를 대량 구매했는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도하게 확보해 둔 것으로 알려졌다. 큰손들의 창고에도 반도체가 쌓였다는 얘기다. 여기에 지난해 4분기에 접어들면서 큰손들의 수요가 대부분 충족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삼성전자의 2018년 4분기 어닝쇼크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부 큰손들의 구매 취소와 핵심 고객사인 애플의 판매 부진 등이었다.
올해 들어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반도체는 통상 한 달 전에 분기별 가격 계약이 이뤄지지만, 큰손들이 구매에 나서지 않고 자체 재고 조정을 하면서 올해 초까지도 1분기 평균 가격 협상을 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재고는 계속 늘어나 오는 2분기까지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지난해 4분기에 이어 올해 1분기까지 재고가 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재고 소진은 당분간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국내외 증권가 시선 ‘부정적’ 삼전·SK “하반기 회복 전망”
통상 재고가 늘면 가격이 내려가고, 공장 가동률을 낮춰 생산량을 줄여 관리한다. 하지만 반도체는 생산 라인을 24시간 가동해야 하기 때문에 재고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생산을 중단하면 오히려 비용이 더 늘어난다. 최근 나노 단위 미세공정으로 반도체 회로 선폭이 갈수록 얇아지면서 생산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재고가 쌓이는 속도는 가파르다. 재고 확산은 결국 평가손실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국내외 증권가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글로벌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는 최근 삼성전자가 올해 반도체 사업에서 2018년보다 19.7% 감소한 631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해 인텔에 이은 2위로 밀려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시장 급성장에 힘입어 지난 2017년 인텔이 24년 동안 지켰던 왕좌를 탈환했다. 전망대로라면 삼성전자는 3년 만에 1위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국내 증권사들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 추정치 수준을 최근 잇따라 낮추고 있다. 일각에선 2020년 1분기까지도 실적 하락세가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국내외 증권사들의 전망치 수정 근거에는 대부분 ‘재고 이슈’가 포함돼 있다.
경기도 이천시 SK하이닉스 전경. 사진=고성준 기자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오는 하반기부터 가격이 안정화 될 것으로 전망한다. 2분기(4~6월)로 예정된 인텔의 신규 중앙처리장치(CPU) 출시가 기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인텔의 신규 CPU 출시에 발맞춰 글로벌 큰손들이 데이터 서버를 늘릴 전망이라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시장 상황에 맞춰 재고를 관리하고 있다”며 “하반기부터 자연스럽게 소진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 역시 “신규 CPU가 고성능이 되면 자연스레 서버 반도체 사용량도 늘어난다. 수요가 올해 하반기부터 회복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