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선호 전 율산 회장 | ||
1975년 6월 자본금 1백만원으로 율산실업(주)를 차려 그해 3백40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리고, 이듬해에 4천3백만 달러, 1977년 1억6천5백만 달러를 기록하며 신화를 만들었던 신선호 전 율산회장.
율산실업은 설립 3년 만에 30배의 수출 성장률을 기록하며 1977년 삼성 현대 대우 등 굴지의 재벌 종합상사에 이어 13번째 종합상사로 지정받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율산은 신진알미늄과 금룡해운, 동원건설 등을 줄줄이 인수, 설립 4년 뒤인 1978년 말 자본금 1백억원, 종업원 8천명에 이르는 신흥 재벌로 부상했다.
그러나 율산신화는 1978년 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79년 1월25일 신 회장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3월20일 신 회장의 형 신명호 당시 재무부 국제금융과장(현 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 신상호씨(전 전남대 철학과 교수, 현 동아기획 사장) 등 3형제가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돼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
이후 율산은 마치 드라마처럼 창업자 구속-부도-공중분해라는 과정을 거치며 재계에서 사라졌다. 율산이 망하는 과정에서 정치권 개입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3공화국 시절 호남 출신 기업인이 운영하는 회사가 석연치 않게 망한 경우가 없지 않았기에 이런 추측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79년 4월3일 당시 검찰은 그를 외국환관리법 위반 및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시켰다. 그는 이 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율산은 공중분해된 뒤였다.
그리고 2000년 9월1일 서울 반포 호남선 부지에 세운 센트럴시티의 메리어트호텔 개관식이 열렸다. 세상은 센트럴시티의 개관을 그의 재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재기한 적도 없고, 망한 적도 없다”며 주변의 시각을 부정했다. 그는 율산 문제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직후부터 센트럴시티(주)의 전신인 서울종합터미널(주) 회장으로 일하면서 센트럴시티 건설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79년 납치에서 풀려났을 때 언론과 인터뷰를 한 이후 줄곧 언론과의 만남 자체를 기피해 왔다. 그런 그가 마침내 20여년 만에 입을 열었다.
―‘신선호의 율산은 망했다, 센트럴시티로 재기했다’고 말하는데.
▲ 지난 79년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재판 받던 시절의 신선호 전 율산 회장(작은사진). 부 친인 신형식옹의 빈소에서 만난 신선호 전 회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최근 애경그룹이 센트럴시티를 인수하는 것을 두고 의혹이 불거지는 등 말이 많다.
▲애경그룹은 센트럴시티를 인수한 주체인 투자펀드회사 I&R코리아의 지분 35% 정도를 갖고 있다. I&R코리아는 투자수익을 노리는 펀드 성격이다. 그들이 지난해에도 20~30%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펀드가 투자수익 회수를 위해 큐캐피탈이라는 또다른 투자회사에 최근 자신들의 지분을 판 것으로 알고 있다.
센트럴시티는 이미 궤도에 올라 수익을 많이 내고 있다. 내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나는 미국식 이사회 제도의 순수 회장으로 남을 것이다. 이사 추천권도 3대2 비율로 I&R코리아가 더 많이 갖고 있다. 나는 대주주의 역할에만 충실할 것이다.
―센트럴시티도 지난해 I&R코리아가 들어오면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던데.
▲나는 동지애로 사업을 했다. 세상에서 율산이 망해간다고 하던 시절에도 많이 주지는 못했지만 월급이 밀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내 손으로 사람을 자른 적이 한번도 없다. 우리는 그런 세대가 아니다. 이런 게 요즘 시대에 맞을 리가 없다. 나 혼자 (변하는)세상을 이길 수도 없다. 구조조정은 내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I&R에서 한 것이다.
―지난해 센트럴시티의 경영권을 넘긴 것처럼 비쳐졌는데.
▲내가 기업활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경제적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 것을 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는 우리나라 회사들이 바잉 에이전트(수집상)였지 무역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일본 회사들은 해운 운송권을 독점하고 있었고, 우리나라 해운회사는 해운공사 정도였는데 원조물자를 실어나르는 정도였다. 그래서 해운회사를 만들어 배를 띄운 것이다. 우리 것을 우리 힘으로 만들어 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경제 무브먼트였다. 센트럴시티는 사회적 시설로 지은 것이다. 나는 이제 정리를 할 때가 됐다. 그래서 물러난 것이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는가.
▲1973년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때 같이 출발한 사람 중 지금 남은 사람이 없다. 최고경영자로 따지면 나는 장수 경영자다. 나는 이제 물러갈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사업을 시작한지 30여년이 지나다 보니까 내가 구세대가 돼버렸다.
현재 인천시장으로 재직중인 안상수 시장이 율산의 말단 직원이었다. 성원건설의 전윤수 회장도 경리과 대리였고 금호건설의 이서형 전 사장도 율산건설의 과장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것이다. 나는 센트럴시티의 후원자로 남을 것이다.
―사업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재미있었나.
▲ 지난 2000년 10월 센트럴시티에 입주한 신세계백화점의 오프닝 행사에참석한 신선호 전 율산회장(왼쪽 머리 희끗한 이). | ||
―율산이 망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얘기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다.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가 잘 되지 않았는가. 민주화도 되고, 경제발전도 이루고, 박정희도 물러나고.
―누가 율산을 망하게 했다고 보는가.
▲지금 얘기해서 무슨 상관이 있나. 원수를 보호합시다(웃음). 나는 학교(서울대 응용수학) 다닐 때 한량이었다. 학교 다닐 때 운동권이었다. 장인은 데모 대장으로 알려진 분이었다. 그러니 안사람과 인연이 이어졌다. 어렸을 때 너무 신경이 예민해서 한량이 되는 약을 10여년 먹기도 했다. 누구를 미워하고 그러는 마음이 없다.
―정치세력 교체에 따라 영향을 받는가.
▲영향이 없을 수는 없다. 장인 어른(부완혁)이 돌아가실 때 정치는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하셨다.
―장인 부완혁 선생 추모집을 내기도 한 것으로 아는데.
▲장인이 발행인을 맡았던 사상계 등록을 유지하기 위해 2년에 한번씩 책을 냈었다. 하지만 금년 봄부터는 사상계를 계간으로 발행한다. 안사람을 위해 지난해 봉래(부완혁의 호)출판문화재단(이사장 부정애)을 세워줬다. (지난 시절에는)정론을 펴면 죽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사업을 하지 않으니….
―형제분들이 모두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신명호 부총재와 신 회장만 박사학위가 없다.
▲형(신 부총재)은 학위과정을 마쳤고 세무대학장까지 마쳤으니까….나는 경제 무브먼트를 위해 사업을 시작해 그렇게 됐다. 나는 우리 사회의 자신감 회복 차원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언론을 피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언론은 엉터리로 쓴다. 나에 관해 확인도 안된 내용을 보도했다. 친구 3명이 율산을 세웠다고 하는데, 율산의 시작은 등기이사로 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셋이 시작했다. 아내(부정애)는 감사로 올라 있었다.
73~75년에 율산실업을 만들어 개인회사로 꾸려가다 무역업을 하기 위해 ‘주식회사 율산’으로 체제를 바꿨다. 75년 단돈 1백만원으로 율산을 시작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처음에는 등기비를 줄이기 위해 최소 자본금 1백만원을 신고한 것뿐이다.
―요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귀국 여부가 화제가 되고 있는데.
▲나는 관청이나 언론과 멀다. 김우중 회장과 100% 다른 사람이다. 나는 외국 관계사업만 했다. 관리들에게 돈 갖다준 적 한번도 없다. 제세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제세는 무역을 한 실적 자체가 없는 회사였다.
오히려 공무원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3공 때 오원철 특보가 도와달라고 해서 기획쪽 일을 도와준 적이 있고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이 도시계획을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준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시 공무원들이 율산에서 교육을 받고 가기도 했다.
―센트럴시티 부지가 서울시에서 받은 땅이라고 하던데.
▲사우디아라비아서 최초로 공사 실적을 기록한 기업이 율산이다. 그때 공사 선수금으로 1백억원을 받았다. 지금 돈 가치로 따지면 1조원은 될 것이다. 그 돈의 3분의 1은 선자재구매로, 3분의 1은 현금으로, 나머지는 부동산을 사들였다.
그 돈으로 사들인 게 서초동 대법원청사 땅 등 20만~30만평 정도 된다. 그랬더니 구자춘 시장이 그 땅이 필요하다며 잠실 롯데월드 부지와 센트럴시티 부지를 강제로 바꿔갔다. 서초동 땅을 갖고 있었더라면 엄청난 돈이 됐을 것이다.
신선호씨는 인터뷰 말미에 “내가 주관하는 것은 30년 동안 사업을 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이제 “재미없다”며 사업일선에서 은퇴할 것임을 재차 확인했다. 그렇게 말하는 신씨의 얼굴에는 율산신화에서 센트럴시티에 이르기까지 겪어온 사업가의 짙은 회한이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