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20일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후보(왼쪽)가 김대중 대통령의 축하화분을 가져온 박지원 비서실장(오른쪽)과 악수하고 있다. 주간사진공동취재단 | ||
“내가 대선을 치르면서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찾아간 것 말고는 잘못한 게 없다.”
당시 노 당선자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대선기간중 끊임없이 논란이 됐던 자신의 정치행보를 둘러싼 당내 비판에 대한 반박이다.
즉 최대의 경쟁자였던 이인제 의원을 경선 이후 끌어안지 않은 것, 민주당 내 동교동계 등 다수 의원을 배제함으로써 스스로 소수파의 길을 선택했던 것 등이 오류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나아가 선거 전날인 12월18일 밤 명동 유세에서 돌발한 정몽준 의원의 노 후보 지지철회 사건도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라는 뉘앙스도 담겨 있다. 그렇지 않아도 신념의 화신인 노 당선자의 자기확신이 더욱 견고해지고 있음이 감지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구정치세력을 떨쳐내고 개혁파만으로 뭉쳐야 대선 승리 및 정치 개혁이 가능하다는 그의 신념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선택이 됐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구정치세력이 노 당선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유지해왔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민주당 동교동계 핵심인사 J씨가 99년 말께 청와대에 제출했던 것으로 알려진 ‘영남후보론’ 보고서는 일찌감치 ‘노풍’을 예고했던 신호탄으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보고서 내용도 노무현 후보가 밀어붙인 대선전략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민주당 외곽조직이 여론조사 등을 토대로 작성한 이 보고서는 ‘주인공’으로 노무현 의원을 내세웠다.
당시만 해도 노 의원은 군소 대선주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보고서는 노무현이 유일한 정권재창출 카드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었다. 우선 영·호남 대결구도 속에서 부산·경남(PK) 출신 후보만이 승산이 있다는 점을 꼽았다. PK가 대구·경북(TK)보다 반 민주당 정서가 약할 뿐만 아니라 YS의 지원이 이뤄질 경우 득표율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는 계산법이다.
보고서는 동교동계와 YS 민주계 간의 ‘신민주대연합’이 성사될 경우 노무현 카드의 성공확율은 급등한다는 점도 지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보수정당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맞서 개혁세력을 결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대교체를 무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도 포인트로 잡았다.
이 보고서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고립무원이었던 노무현 의원으로서는 백만원군을 얻은 셈이었던 것만큼은 명백하다. ‘이인제 대세론’이 지배하던 시기에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부각시킨 보고서가 청와대에 접수됐기 때문이다.
이후 김 대통령이 김중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노 의원을 영남 주자로 키우는 배려를 해왔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김 대통령의 ‘노무현 장관 기용’은 단적인 예다.
노 의원은 2000년 4·13총선에서 공언한 대로 부산에서 출마하지만 낙선함으로써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다. 하지만 4개월 만인 8·7개각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에 기용됨으로써 극적으로 돌파구가 열린다.
▲ 2000년 4·13총선에서 낙선한 노무현을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한 김대중 대통령. | ||
당시 여권 핵심관계자들은 “노무현 스스로 유력 대선주자로서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게 눈에 보였다”고 전한다.
총선에서 의원 배지를 달지 못한 노무현 당시 민주당 부총재는 개각 하마평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자 당 출입기자들을 언론사별로 접촉했다는 후문이다. 수줍은 성품에 언론플레이 같은 구정치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노 부총재의 스타일상 흔치 않은 일이었다.
장관을 그만둔 다음에도 김 대통령의 지원을 적지 않게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수석을 지낸 B씨는 “노무현씨가 해수부에서 떠난 뒤 청와대로 들어올 때 따로 만나 식사를 했다. 그때 ‘김 대통령이 무엇을 맡겨줘야 싸우지 아무 자리가 없어 일을 못하겠다’고 푸념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온정주의적 태도’를 보이다가 구설수에 말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부산지역 후원회장이었던 신상우 전 의원의 사촌동생 S씨와 관련된 청탁전화 사건은 대표적 케이스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1년 말에 S씨가 모종의 형사사건에 걸리자 부산지검 동부지청장 L씨에게 ‘선처’를 부탁하는 전화를 수차례 걸었다고 한다. 2002년 경선에서 후보가 된 뒤에 이 같은 의혹을 한나라당측이 제기해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노 후보는 대선후보 경선 초반전에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선두로 떠오르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냉정한 승부사의 기질이 전면에 부각된다. 개혁의 기치를 전면에 내걸고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철저하게 고수했다. 같은 개혁파인 김근태 후보가 경선 막판까지 노 후보 지지선언을 하지 않았던 것도 노 후보측의 밀어붙이기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많다.
민주당 동교동계 및 한나라당 출신 영입파 의원들이 노 후보에게 등을 돌린 것도 ‘냉대’ 탓이라는 게 정설. 구세력이 먼저 노 후보에게 등을 돌린 게 아니라는 얘기다.
정치권의 생리상 유력주자에게는 힘이 쏠리게 마련이다. 민주당 경선이 종반전으로 치닫던 4월 중순을 넘기면서 노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20%포인트까지 벌어졌다.
당연히 대다수 민주당 중진들은 노 후보 앞으로 달려갔다. 당선 직후에 열린 어떤 지방 모임에서는 참석자들이 서로 밥값을 내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노 후보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고 한다. 경선 승리 직후 DJ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한 중진의원이 노 후보가 들어서자 “차기 대통령께서 오십니다”라고 박수를 쳤으나 노 후보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중진의원은 머쓱해졌다. 노 의원은 그 중진을 이후에도 찾지 않았고 그 중진도 ‘반노파’로 굳어졌다.
당시 민주당 핵심 의원은 “노 후보는 자신을 정의의 세력으로 생각하면서 상당수 민주당 의원 등을 악의 무리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설령 그런 이분법을 갖고 있어도 대선에서 이기려면 모두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토로하기도 했다.
▲ 청와대가 노무현 후보를 밀고 있다며 소위 ‘음모 론’을 주장한 이인제 후보. | ||
김 대통령과 박지원 청와대비서실장 그리고 가신그룹인 동교동계가 경선에서 노 후보를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게 이 후보측 주장이었다.
만약 이 후보측 주장이 먹혀들었다면 참신함과 개혁성을 최대 무기로 삼고 있는 노 후보로서는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후보는 음모론으로 인해 오히려 스스로 ‘구태 정치인’이라는 부메랑을 맞게 된다.
다만 이 후보측이 제기했던 음모론의 배경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이 후보측의 자금조달책이었던 김운환 전 의원이 경선전 초반인 3월 하순에 긴급 체포됐기 때문이다.
94년 5월과 6월 당시 민자당 부산시지부위원장이었던 김 전 의원이 동방주택 이영복 사장으로부터 5억원을 받고 자연녹지인 다대지구 46만2천여㎡를 택지로 용도변경해주도록 부산시측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혐의였다.
문제는 이 같은 김 전 의원의 혐의는 DJ정권 초부터 여의도 정가에서 파다하게 떠돌았던 얘기였다는 점이다.
당연히 김 전 의원 사건이 대선후보 경선이라는 중대국면에 터진 배경은 미스터리로 떠올랐다. 당시 여권 핵심부는 ‘오비이락’이라고 설명했지만 노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이인제 죽이기’의 신호탄이었다는 게 이 후보측 주장이었다. 당시 정부의 한 고위인사조차도 이렇게 의구심을 표현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음모론은 실체가 없다고 본다. 다만 이인제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부분은 있다. 영남지역 경선조직을 관리하던 김운환 전 의원이 대구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노상에서 체포되지 않았나. 굳이 현 시점에서 그를 체포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아무리 그가 전 의원이지만 검찰총장에게 보고되지 않고 진행될 수 없는 사건인데 이상하다.”
어쨌든 조직선거를 치르던 이 후보측은 김 전 의원 체포 직후부터 급격하게 돈줄이 마른 반면 상대적으로 노 후보측은 반사이익을 보게 된다.
음모설의 핵심 타깃이었던 박지원 실장은 몸조심을 하면서도 ‘노풍’이 거세지는 것에 대해 희색이 만면한 분위기였다.
박 실장은 경선이 종반전으로 치닫던 2002년 4월 중순쯤 몇몇 기자들과의 저녁모임에서 “개인적으로 노풍을 언제부터 감지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에 박 실장은 즉각 “정치개입은 정말 안한다. 민주당에서 3명 정도가 진념 부총리의 서울시장 출마를 추진해달라고 할 때도 거절했다. 그 내용을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잘했다. 앞으로는 그런 내용을 보고도 하지말라’고 했다”고 털어놨다.
노풍 감지 시기를 묻는 질문을 노풍 만들기에 대한 질문으로 오인한 것. 그러나 박 실장은 노풍과 자신이 무관함을 강조하면서도 노풍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는 열변을 토했다.
“정치 파괴를 바라는 욕구가 동력이다.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퇴보한다. 이회창이 그 경우다. 그동안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론도, 되면 좋겠다고 보는 여론도 없었다. 이회창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여론만 있었다. 이회창은 그 여론 하나에 만족해서 4년 동안 팔짱을 끼고 지내다가 노무현 바람에 당한 것이다.”
노 후보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천정배, 신기남 의원 등을 필두로 한 소위 개혁파들 중심으로 캠프를 꾸린 속마음은 누구도 모른다. 동교동계를 포용할 경우 ‘후보 사퇴론’을 간단하게 잠재울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노 후보는 가시밭길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다만 노 후보가 본능적으로 기성정치인 내지는 보수정치인들과의 대결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로인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생 과정은 정치적 격론으로 점철됐다는 분석은 흥미롭다.
이와 관련, 노 후보 부인인 권양숙 여사의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002년 대선전에 무소속 정몽준 의원이 뛰어든 후 권 여사는 정 의원의 부인인 김영명씨와 어떤 모임에서 나란히 앉은 적이 있다. 이에 사진기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구했다.
권 여사는 다소 어색한 듯한 태도를 보이며 김씨의 두 손을 잡았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노 후보는 나중에 권 여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 마치 부자 마누라에게 구걸하는 것처럼 보였다”라고 한마디 했다는 후문이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