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80년대까지만 해도 시장점유율 1위를 달렸던 삼양라면이 ‘우지파동’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내 부도를 낸 데 이어 4위 업체인 빙그레도 최근 라면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최근 빙그레는 “시장 상황이 개선되지 않아 라면사업을 정리키로 했다”며 “생산 설비는 적절한 원매자가 나타날 경우 매각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1986년 라면시장에 뛰어든 이후 17년 만의 일. 자산을 기준으로 30대 기업은 아니지만, 알짜재벌로 알려진 빙그레가 돌연 라면사업을 정리한 것을 두고 업계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동안 라면을 생산해왔던 설비 등이 아직 팔리지 않았음에도 서둘러 정리절차를 진행하자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오가고 있다.
빙그레는 고 김종희 한화그룹 회장의 차남이자, 김승연 대한생명 회장의 동생인 김호연 회장이 이끌고 있는 기업. 이 회사는 지난 89년 한화그룹이 계열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모기업으로부터 독립, 김호연 회장이 독자 경영하고 있다.
김승연-호연 형제는 한때 한화그룹 계열사에 대한 재산 분배문제로 법정다툼까지 벌이는 등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그 후 빙그레는 탄탄한 매출구조를 바탕으로 성장세를 기록, 알짜배기 회사로 거듭났다.
이런 상황에서 빙그레가 17년간 지속해온 라면사업에서 돌연 손을 뗀 이유는 뭘까.
박일환 빙그레 홍보실장은 “핵심사업에 역량을 집중해 수익성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매각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라면사업에서만 30억원대의 적자를 보는 등 사업개시 이후 흑자를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박 실장은 “지난 86년 라면사업에 뛰어들 당시부터 이 시장은 경쟁이 치열했다”며 “당시 시장에 뛰어든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빙그레의 라면사업은 출범 초기부터 시장장벽이 높았으며, 17년 동안 수익을 내지 못한 골칫덩어리였다는 얘기.
업계에 따르면 지난 86년 빙그레가 라면시장에 뛰어든 것은 유휴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주력 제품이 아이스크림, 가공유 등 계절의 영향을 받는 것이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선택한 사업이 라면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면시장은 농심이 전체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해 사실상 독식한 데다, 후발업체인 오뚜기가 발빠르게 나머지 시장을 차지해 빙그레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빙그레는 지난해 9월(회계연도 지난 2001.10.1∼2002.9.30)기준으로 전체 매출 5천5백18억원,순익 1백84억원을 기록했다. 이 중 라면은 매출 3백28억원을 기록, 전체 사업부문의 5.9% 정도를 차지했다.
특히 라면스낵 사업의 생산능력은 지난 97년 2억1천만여개에서 지난 2002년 2억3천만여개로 늘어났으나, 실제 생산 실적은 해를 거듭할수록 줄었다.
결국 이같은 생산실적은 매출 악화로 이어져 빙그레로서는 라면사업을 더 이상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업계에는 빙그레의 라면사업 포기가 단순히 적자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동안 아이스크림, 스낵류 등 ‘보수 경영’에 치중해온 빙그레가 라면사업을 접는 것을 계기로 ‘공격 경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것.
실제로 빙그레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라면사업의 적자가 계속 누적됐음에도 이 사업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9월 감사보고서에서는 “라면은 품목수를 줄이고 시장 차별화에 성공한 ‘매운콩’, ‘뉴면’ 등을 중심으로 품목을 대형화해 수익 개선에 기여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 지난 2001년 11월부터 4개월 간에 거쳐 ‘라면의 산화를 억제하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를 내부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경쟁사 관계자는 “손을 뗄 사업에 대해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연구를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라면사업을 접는 것을 계기로 사업의 중심축이 이동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듯 빙그레는 지난 3월24일 라면사업을 접겠다고 공식 발표한 뒤 곧바로 회사의 사업목적을 ‘건강보조식품, 특수영양식품, 곡류가공식품 등의 제조판매’로 변경했다.
현재 빙그레가 생산하는 주요 가공품은 19년째 생산되고 있는 바나나맛 우유와 딸기맛 우유, 초코레떼, 생큐커피우유 등. 최근에는 생큐메론맛 우유를 새로 출시하며 시장 점유율 확대에 나서고 있다.
빙그레의 가공유 부문은 지난 98년 전체 시장의 15.6%를 차지했으나, 지난 99년에는 26.6%, 2001년 26.7%로 상승세를 거듭해 지난해에는 전체 시장의 28%를 차지했다. 가공유 제품의 가파른 상승에 고무돼 시장경쟁력이 떨어지는 라면을 접고, 대신 가공유시장에 힘을 집중하겠다는 의미라는 해석.
일단 빙그레가 라면포기를 선언하고 난 후 시장의 평가는 좋았다. 박재홍 대신증권 선임연구원은 “빙그레가 라면사업을 정리해야 한다는 얘기는 일찍부터 시장에서 나왔다”며 “지금이라도 라면 사업부문을 정리한 것에 대해 시장에서는 호재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