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수된 의견서 3만여 건, 90%가 한국 화이트국가 배제 찬성했다.” (7월 25일, 요미우리 신문)
“국민 의견 공모에 4만 건이 접수되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대부분 개인을 중심으로 한 찬성 의견으로 보인다.”(7월 29일,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7월 1일부터 24일까지 한국을 ‘화이트 국가’ 명단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고시하고 일본 국민에게 의견을 받았다. 조만간 담당 부국인 일본 경제산업성이 의견 취합 결과와 입장을 발표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의견 공모 결과를 앞세워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근거로 강조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의 일본 언론의 보도대로 국민들의 찬성과 지지를 받고 있는 만큼 한국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는 정당하다는 취지다. 그러나 ‘일요신문’ 취재 결과 이 의견공모 제도는 일본 내에서 인지도도 없고, 의견접수 방식도 허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 1일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고시하고 국민 의견을 받았다. 사진은 일본어 원문(위)과 번역본(아래). 사진=일본 전자 정부 종합 창구
# 인지도, 참여도 모두 낮은 의견 공모 제도
일본 정부가 자국 국민을 대상으로 의견을 모은 방식은 ‘퍼블릭코멘트’라는 제도를 통해서다. 일본은 2005년 6월 일본 행정 절차법 개정 이후 법령 개정이나 조례를 정하기에 앞서 국민에게 의견을 묻는 이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헌법 개정부터 사소한 행정 절차 변경까지 모두 퍼블릭코멘트 실시 대상이다. 의견을 받지 않는 경우엔 안건의 담당 정부 부국이 일본 행정 절차법 제43조 제5항에 따라 그 이유를 공시해야 한다.
퍼블릭코멘트 제도는 일반적인 여론조사와 방법이 다르다. 일본 중앙정부의 인터넷 소통 채널인 ‘전자 정부 종합 창구(e-gov)’를 통해 개정안 내용 또는 달라지는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이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의견서’ 형식으로 받는다. e-gov를 보면 “의견서는 ‘적절한 방법(이메일과 FAX 등)’으로 제출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일본 현지에선 퍼블릭코멘트 제도에 대한 인지도가 낮다. 복수의 일본 현지 관계자들은 최근 한-일 경제 갈등에 대해선 각각 다른 의견을 내면서도, 퍼블릭코멘트 제도 자체에 대해선 “그런 제도가 있는 줄 몰랐다”는 공통된 답변을 내놨다.
익명을 원한 일본의 한 주간지 기자는 “국민들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기자들도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걸 몰랐다. 최근에 이슈가 돼서 몇 번 뉴스에 오르내리는 걸 보고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15년째 거주하며 유튜브를 통해 일본 소식을 전하고 있는 박가네채널 운영자는 서면 인터뷰를 통해 “평소에 진행되는 퍼블릭 코멘트를 보면 인지도는 높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며 “언론에 보도된 ‘4만 건’은 지극히 이례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방송을 통해 이 문제를 지적했다.
실제 ‘일요신문’이 일본 전자정부 종합 창구에 올해 1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올라온 안건을 집계한 결과, 낮은 인지도만큼 일본 국민들의 퍼블릭코멘트 참여도 저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의견 공모가 마감돼 결과 또는 의견 접수 건수를 확인할 수 있는 안건은 총 1163건. 의견을 받지 않고 법안을 개정하거나 행정절차를 변경한 530건은 제외했다.
의견 공모를 받아 처리된 안건은 총 633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1~10건의 의견을 받은 안건이 353건(55.7%)으로 가장 많았다. 의견이 한 건도 접수되지 않은 ‘0건’ 법안은 148건 (23%)을 기록했다. 100건을 넘는 안건은 20건이 채 되지 않았다. 4만 건의 의견이 접수된 안건은 퍼블릭코멘트 제도가 도입된 2005년 이후 처음이었다.
올해 국민 의견이 가장 많이 접수된 안건은 지난 5월 10일 일본 국회를 통과한 ‘아동·육아 지원법’ 개정안이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 온 보육 무상화 법안이다. 3~5세 아동의 보육비를 전면 무상화하는 내용 등을 담은 이 개정안은,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 보육과 교육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아베 총리 측의 주장과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부딪치면서 법안 통과 전후로 일본 내에서 크게 이슈가 됐다.
이 개정안과 관련해 접수된 의견수는 총 8438건이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조치에 접수된 의견이 일본에서 올해 상반기 ‘뜨거운 감자’였던 개정안 보다 4배 이상 많았고, 제도 도입 14년 만에 신기록까지 세운 셈이다.
일본 전자정부종합창구 페이지에는 2005년부터 2019년 8월 1일 현재까지 총 27458건의 안건이 올라왔다. 사진=일본 전자정부종합창구
# 이례적인 일본 언론의 적극적 홍보
의견 접수 방식을 보면 의문은 더 커진다. 일본 정부는 퍼블릭코멘트의 ‘의견서’는 통상 팩스와 이메일로 받는다. 그러나 절차가 복잡하다. 팩스로 제출하려면 관련 안건에 PDF파일로 올라온 의견양식을 출력해 자필로 의견을 쓴 다음 전송해야 한다. 이메일 역시 같은 방법으로 PDF파일을 출력해 직접 의견을 적고, 이를 스캔한 뒤 이메일에 첨부해 보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이번에 접수된 의견 대부분이 이메일로 제출됐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지난 7월 21일 일본 참의원 선거 투표율은 48%에 불과했다. 사상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던 1995년 이후 24년 만이다. 선거 기간은 퍼블릭코멘트가 진행된 기간과 겹친다. 투표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일본 국민들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안건에 의견을 내기 위해 앞서의 과정을 거쳐 이메일을 보냈다는 얘기다.
팩스와 이메일 외에도 e-gov에 올라온 안건 페이지에서 곧바로 의견을 접수할 수 있다. 다만 로그인을 비롯한 별도의 본인확인 등의 절차는 없다. 이름, 연락처, 주소 등 개인정보는 ‘선택 사항’이다. 2000자로 제한된 의견을 적는 항목만 필수 사항이다. 기자가 한국에서 개인정보는 입력하지 않고 의견란에 법령 제목만 쓴 의견을 보냈는데, 정상적으로 접수가 됐다는 안내 메시지가 나왔다. 같은 내용으로 여러 차례 중복 제출도 가능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와 관련한 별도의 공청회는 한 차례도 열지 않았다. 국민 의견 대부분을 앞서의 의견서 접수 방식을 통해 온라인으로만 받았다는 얘기다. 일본 현지 기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지난 7월 일본 일부 지역에서 국회의원이 관련 설명회를 열었지만,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수준에 그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퍼블릭코멘트 의견 접수 페이지. 개인정보 입력 등은 선택 사항이다. 사진=일본 전자 정부 종합 창구
복수의 일본 현지 관계자들은 이번 퍼블릭코멘트에 대한 ‘이례적인’ 일본 국민들의 반응과 관련해 일본 언론의 역할에 주목한다. 일본 언론은 퍼블릭코멘트가 진행된 지난 7월 1일부터 24일까지 의견 공모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참여를 독려해 왔다. 공모 마감 후에는 접수 건수가 1만 건을 넘을 때마다 보도하기도 했다. 제도를 몰랐던 일본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일본 언론이 퍼블릭코멘트 진행을 홍보하고 집계 상황을 중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의 일본 기자는 “지금까지 퍼블릭코멘트가 ‘그날의 이슈’가 되는 일은 없었다. 아침, 저녁의 메인 뉴스로 보도되는 일도 없었다”며 “최근 일본 정부 입장에서 ‘한국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는 정당하다’는 입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퍼블릭코멘트 관련 정보를 언론에 전하면서 이슈로 부각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실제 퍼블릭코멘트 의견 공모와 관련한 일본 보도는 대부분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쳤다. 사실상 이번 퍼블릭코멘트는 일본 정부와 언론의 ‘합작품’인 셈이다.
다른 일본의 저널리스트는 “퍼블릭코멘트에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모인 것으로 보인다”며 “잘 알려지지도 않은 제도에 번거로운 절차를 감수하고 의견을 접수했다면 ‘찬성’ 의견을 냈을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4만 명이란 숫자에 일본 국민 전체 의견이 담긴 건 아니다. 그동안 보도된 내용에는 빠졌지만 이번에 접수된 의견서 가운데 반대 의견도 적은 편은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라고 말했다.
한편, ‘일요신문’은 이번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 담당 부국인 일본 경제산업성에 공식 질의를 담은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로 취재 요청을 했으나 경산성 관계자는 “관련 부서에 전달하겠다”는 답변만 전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