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이 창업된 것은 지난 52년. 부산 피난 시절에 (주)한국화약을 창업한 것이 시작이었다. 탁월한 로비력과 집념으로 사업에 성공한 김종희 전 회장은 1970년대 접어들면서 사업영역을 금융 석유화학 기계 무역 건설 등으로 확대했다. ‘다이너마이트 김’이라 불린 김종희 회장은 정계에서도 인정을 받아 권력실세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한화는 1981년 김종희 전 회장이 갑자기 작고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장남인 김승연 회장의 나이가 20대로 중책을 맡기엔 어렸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은 부친이 작고하기 4년 전인 지난 77년 11월 이리역 화약폭발사고 직후 회사가 흔들리자 미국 유학중에 급거 귀국해 경영수업에 들어갔다.
▲ 김승연 회장과 가족이 지난 99년 10월29일 계열 프로야구 단 한화 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후 기쁨을 만끽 하고 있다. | ||
이들 두 기업의 막대한 부동산을 손에 쥐면서 한화는 엄청난 자산을 가진 탄탄한 재벌로 거듭났다. 화약사업이 부진을 겪기 시작한 것과 때를 맞춰 새로운 사업영역으로 발을 뻗게 됐다.
그러나 김 회장의 공격적 사업확대는 90년대 들어 부작용을 낳았다. 막대한 부동산을 담보로 차입한 부채가 금리폭등으로 빚을 눈덩이처럼 불려놓는 바람에 그룹 전체가 휘청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IMF 사태가 터진 직후 구조조정을 통해 금융, 언론, 기계사업을 접고 화학사업으로 사업구조를 단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황금알을 낳아주던 화학산업은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수익성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김승연 회장은 금융사업을 통해 새 탈출구를 찾고 있다. 기존 그룹 전체의 덩치보다 더 큰 대한생명을 전격 인수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기존의 사업구조만으로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대한생명 인수에 나서게 된 배경인 것이다. 결국 대한생명의 성공적 회생이 한화그룹의 미래를 결정짓는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룹 전체를 장기적으로 먹여살릴 수 있는 보다 확실한 신수종사업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기도 하다. 금융사업은 호황 때는 막대한 부를 안겨주지만 일단 불황이 닥치면 걷잡을 수 없는 위기를 몰고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화는 첨단산업에 대해 눈길을 돌리고 있기도 하다. 나름대로 정보통신시장을 기웃거리지만 그룹의 몸집이 무거운 데다, 경영의식 자체가 보수적이어서 둔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게다가 90년대 말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알짜사업을 대거 청산한 부분도 두고두고 김승연 회장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