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추진위원인 이건희 회장이 지난 4월3일 청와 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악수하고있다. | ||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재벌들의 명암을 보면 삼성과 LG는 기존의 확고한 입지를 더욱 다져가고 있는 모습이다. 반면 현대그룹과 SK그룹은 생존마저 위협받으며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 직후 강도 높은 재벌개혁을 천명하자 재계에서는 삼성의 안위를 걱정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인 삼성이 재벌개혁의 직격탄을 맞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우려에 대해 당시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업은 영원히 여당편입니다.”
역시 삼성은 생존의 법칙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재용 상무의 재산축적 문제 등 골치아픈 현안이 쌓여있지만, 삼성은 노무현 정부와도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재벌총수로서는 유일하게 청와대에 초청받아 단독회동을 했다. 이는 DJ정부 출범 직후에도 이 회장은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단독회동을 가진 유일한 재벌총수였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주는 대목.
뿐만 아니다. 삼성은 경제연구소를 통해 노무현 정부가 해결해야 할 경제정책 국정과제를 정밀 분석해 전달했다. 이 보고서는 노 정부의 경제정책바이블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정과제추진위에 삼성 출신 인사가 2명이나 진출한 것도 지나칠 일이 아니다.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정통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진 장관은 이건희 회장의 핵심 측근경영인이라는 점에서 삼성과 노무현 정부의 밀월관계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삼성은 현정부와 불편한 관계가 예상되던 전경련에 현명관 전 삼성물산 부회장을 상근부회장으로 입성시켜 재계와 정부의 화해무드 조성에 앞장서게 했다.
이와 함께 이 회장은 재계가 주저하던 주5일 근무제를 5월부터 시행키로 했다. 이 조치는 주5일제 근무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진 정권과 재벌간의 대립관계를 풀어낼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삼성은 주5일 근무제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해오던 기존 입장을 바꾸었다.
삼성은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에 앞서 미국에 5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대목은 압권. 이 발표는 미국 조야와 경제계에 끈이 없는 노무현 대통령의 입지를 크게 넓혀준 부분이었다.
LG도 경쾌해 보인다. 노 대통령의 아들이 LG전자에 근무한다는 점도 있지만, 연고가 부산이라는 점이 LG에게는 심정적으로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LG 역시 재벌개혁의 표적이 되고 있는 구조조정본부를 가장 먼저 없애면서 정부 정책에 화답하고 있다. 지주회사인 (주)LG를 출범시키면서 재벌개혁의 방향을 정부측에 제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있는 곳은 SK그룹이다.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최태원 SK주식회사 사장이 구속되면서 그룹 전체가 위기국면에 접어들었다.
▲ 지난 1월22일 금강산에서 돌아온 정몽헌 회장이 속초항 입국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
그러나 최종현 전 회장이 작고한 후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경영을 맡은 최태원 회장과 그를 보필하는 전문경영인들의 어설픈 행보로 그룹은 위기에 내몰렸다. 분식회계 장부가 드러난 것이나, 젊은 혈기에 전문경영인들과 맞닥뜨린 최 회장의 수읽기가 틀어진 것이다.
결국 이 틈을 비집고 소버린이라는 정체불명의 해외펀드가 지주회사인 SK주식회사의 지분을 대거 매집하면서 오너십마저 위협받고 있다. 소버린이 지분을 매각하거나 의결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SK그룹은 독자경영권 행사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란 경고음인 셈이다.
범 현대 계열사들도 노무현 출범 이후 마음이 편치 않다. 특히 현대그룹의 적통을 주장하는 정몽헌 계열의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아산, 현대하이닉스 등은 대북송금이라는 늪에 빠져 회생을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들 정몽헌 계열사들은 대선 때까지만 해도 심정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은근히 바랐다. 당시 현대 관계자는 “대북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민주당 정권이 유지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는 무산됐다. 노무현 정부는 결국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 현대 계열사에 대한 전면 조사에 착수한 상황이다. 대북송금과 관련해 현대그룹의 핵심 관계자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있어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대북송금 문제는 특검이 끝나더라도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올 공산이 커 현대로서는 부담이 되고 있다. 여기에 하이닉스 지원에 대한 공적자금 문제까지 불거질 경우 현대로선 직격탄을 맞을 게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