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장기미제사건인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특정됐다는 사실은 9월 18일 몇몇 매체의 단독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결정적인 증거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5·7·9차 사건의 증거품에서 나온 DNA와 이춘재 DNA가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감정결과였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미제수사팀은 7월 중순 국과수에 9차 사건 증거품에서 나온 DNA와 이춘재 DNA의 감정을 의뢰해 8월초에 DNA가 일치한다는 결과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경찰은 5·7차 사건 증거품에서 나온 DNA를 다시 국과수로 보냈고 역시 일치한다는 결과를 받았다. 4차 사건 증거품을 국과수로 보내 감정을 의뢰한 경찰은 이춘재 관련 주변 수사를 진행해 9월 18일 비로소 1차 대면조사를 벌였다. 그리고 바로 그날 일부 언론에서 그 사실을 확인해 단독 보도했다. 그렇지만 이춘재는 관련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인 반기수 경기남부청 2부장이 화성연쇄살인사건 브리핑을 열고 사건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되자 언론이 먼저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춘재 관련 취재를 이어가며 각종 단독 보도를 쏟아낸 것. 당시만 해도 이춘재는 청주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1994년 청주에서 벌어진 처제 성폭행 및 살인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부산교도소에 복역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9월 19일 언론을 통해 이춘재의 본적이 화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물론 본적이 화성이라고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그가 화성에서 살았다고 단정 지을 순 없다. 그리고 이날 경찰의 2차 대면 조사가 벌어졌지만 이춘재는 혐의를 부인했다.
9월 20일 이춘재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우선 이춘재가 1963년 화성에서 태어나서 1993년까지 살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86년 결혼한 이춘재가 1993년 충북 청주로 이사한 뒤 청주에서 처제 성폭행 및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 조선일보는 이춘재 어머니 김 아무개 씨(75)의 인터뷰를 보도했다. 그러나 이날 이뤄진 3차 대면조사에서도 이춘재는 혐의를 부인했다.
이춘재 대면조사에는 화성사건특별수사본부 진술분석팀 프로파일러들이 투입됐다. 진술분석팀장인 공은경 경위(여·40)는 2009년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심리분석을 맡았던 프로파일러로 라포 형성을 통해 자백을 이끌어 낸 바 있다. 이번에도 진술분석팀은 이춘재와의 라포를 형성하는 데 집중했다. 수사 초기인 9월 18일 언론 브리핑에서 경기남부경찰청은 “현재 조사 초기 단계로 용의자와 라포를 형성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3차 대면조사 이후 4일 만인 9월 24일 4차 대면조사라 이뤄졌고 하루 뒤인 25일 5차 대면조사가 이뤄졌다. 4차 조사부터는 대면조사에 프로파일러 9명을 투입했다. 3일 동안 1·2·3차 진술 내용을 분석한 경찰이 진술분석팀을 대폭 늘려 본격적인 대면조사에 돌입한 것. 9월 25일 결정적인 사안이 하나 더 등장한다. 바로 이춘재의 졸업사진이다. 이날 한국일보는 독자가 제공한 수원의 한 고등학교 졸업앨범 사진을 공개했는데 여기에 실린 이춘재 사진이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 당시 작성된 몽타주와 매우 흡사했다.
이춘재의 졸업사진과 몽타주. 사진=MBC ‘실화탐사대’ 방송 화면 캡처
몽타주는 1988년 9월 7일 7차 사건 당시 용의자로 보이는 남성을 태운 버스의 운전기사 강 아무개 씨와 안내양 엄 아무개 씨의 진술을 통해 작성된 것이었다. 이미 강 씨는 고인이 됐고 경찰은 엄 씨를 찾아내기 위해 수사력을 모았고 4차 조사가 이뤄진 9월 24일 즈음 연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엄 씨는 9월 26일경 경찰 조사에 참여했고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은 30년여 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법최면 전문가 2명을 투입해 조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이춘재의 사진을 본 엄 씨로부터 당시 목격한 범인이 맞다는 진술을 얻게 된다.
이렇게 목격자 진술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하나 더 확보된 상황에서 9월 27일 7차 대면조사가 이뤄졌다. 이즈음 진술분석팀은 어느 정도 이춘재와의 라포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춘재의 자백 이후 경찰은 “이춘재가 지난주부터 심경 변화를 일으켰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사흘 뒤인 30일 8차 대면조사가 이뤄진다. 여전히 이춘재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이미 심경 변화를 이끌어낸 진술분석팀은 서서히 자백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가 하나 더 등장한다. 국과수에서 4차 화성연쇄살인사건 증거품에 대한 DNA 감정 결과가 나온 것. 이번에도 역시 DNA는 이춘재의 것과 일치했다. 이를 통해 경찰은 10건의 화성연쇄살인사건 가운데 모방범죄로 드러난 8차 사건을 제외한 9건 가운데 4·5·7·9차 사건의 범인이 이춘재라는 유력한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10월 1일 경찰은 이춘재에 대한 9차 대면조사를 벌인다. 14일 동안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은 진술분석팀을 통해 이춘재와의 라포를 형성하며 심경 변화를 이끌어 냈으며 목격자 진술, 추가 DNA 감정 결과 등의 증거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리고 결국 이춘재가 모든 혐의를 자백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가운데 DNA 감정으로 결정적인 증거가 드러난 4건과 나머지 5건의 혐의는 물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화성과 청주 인근에서 벌어진 추가 살인사건 5건과 강간과 강간미수 사건 30여 건까지 자백했다.
조재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