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을 통한 통신시장 발전과 국가적 경제유발효과, 나아가 대국민 통신복지를 향한 이른바 ‘유효경쟁 원칙’이 KT의 철통같은 시내전화 독점구조마저도 허물었던 셈이다.
출범 당시만 해도 말 그대로 ‘장밋빛 환상’을 제시했던 하나로통신은 그러나 불과 6년도 채 못 돼 존폐의 기로에 섰다. KT에게 실질적인 경쟁상대가 되긴 고사하고, 이젠 회사의 간판을 내려야 할지 고민해야할 판이다. 때론 불안하긴 했지만 하나로통신은 올 초만 해도 겉으로 보기엔 괜찮았다.
▲ 하나로통신이 출범 6년도 채 못 돼 심각한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사진은 고양시의 하나로통신 본사.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하나로통신의 경영위기는 지난 4월 신윤식 전 회장의 퇴임을 계기로 급속히 표면화됐다. 다시 말해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최고경영자(CEO)의 공백이 곪은 속을 드러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 회장의 일선후퇴는 하나로통신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수면위로 떠올린 계기일 뿐, 근본 원인은 창립 당시부터 안고 있던 태생적인 한계다.
무엇보다 본질적인 어려움은 통신산업이 지닌 ‘장치’산업의 속성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97년 출범 때 신 회장이 밝혔던 하나로통신의 경영비전은 종합 유선통신서비스 전문업체. 음성과 데이터(인터넷)를 통합한 ‘종합유선통신’ 업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시내전화망이 기본이지만, 여기서 승부수를 걸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당시만 해도 호시절에 안주하던 공기업 KT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기업시장과 개인 대상의 데이터 서비스 시장을 일군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의욕에 넘쳐있던 하나로통신으로서는 비록 주요 거점에 제한됐지만 시내전화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해 막대한 인프라 투자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하나로통신은 98년부터 초고속인터넷 시장에서 미래의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하나로통신은 전화선을 기반으로 한 비대칭가입자망(ADSL) 기술을 내세워 초고속인터넷 시장 공략에 본격 나서게 된다. 여기서 또한 엄청난 인프라 투자가 단행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방대한 통신인프라와 자금력을 가진 KT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한때 초고속인터넷 기술방식 가운데 종합정보통신망(ISDN)쪽으로 기울던 KT는 하나로통신의 무서운 기세에 놀라 역시 같은 ADSL로 방향을 튼다.
99년부터 시작된 KT의 공세는 불과 1년 만인 2000년 초고속인터넷 시장점유율을 뒤집었다. 하나로통신과 비교할 수 없는 KT의 막강한 시내전화 가입자망 덕분이었다.
반대로 하나로통신은 이때부터 또 다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통신공룡 KT와 초고속인터넷 시장에서 전면전을 펼쳐야 했던 것이다. 하나로통신은 지난 2000년 이후 초고속인터넷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면서 KT에 맞서왔다. 하지만 이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뿐, 엄청난 비용부담이 옥죄어왔다.
이 같은 불운탓에 하나로통신은 출범 5년째를 맞은 지난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업이익을 흑자로 돌린다. 그것도 1천만 초고속인터넷 시장에서 30%의 점유율에 간신히 올라선 덕분. 하지만 지난 6년간 KT와 맞서는 일련의 과정에서 하나로통신은 출혈투자가 불가피했고, 이는 곧 엄청난 채무로 이어졌다.
지난 상반기 현재 하나로통신의 채무는 2조4백11억원. 지난해 매출 1조2천5백38억원에 영업이익 60억원, 올 상반기 매출 6천7백35억원에 영업이익 1백16억원으로 적어도 사업적 측면에서는 견조하지만 2조원에 달하는 부채부담을 메우기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때문에 지난해 영업이익 흑자전환에도 불구하고 1천2백31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하나로통신은 상반기 손실도 6백74억원에 육박했다. 당장 이달 22일 만기 도래한 1억달러 상당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비롯해 올해 갚아야 할 단기채무만도 3천억원에 이른다.
여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은 LG(15.89%), 삼성전자(8.49%), SK텔레콤(5.3%), 대우증권(4.3%) 등 대주주들의 이해관계에 떠밀려 단기유동성 위기 해소방안조차 확답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하나로통신의 위기는 지난 6년간 통신공룡 KT와 대적하면서 엄청난 시설투자가 불가피했고, 이로 인해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부채가 신 회장의 퇴임이라는 경영권 공백과 맞물리면서 표면화된 것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신 회장의 공백은 삼성, LG, SK 등 대주주들이 자신들의 전략적 목적 아래 하나로통신을 저울질하는 현 상황을 부채질하게 됐던 셈이다.
하나로통신은 당초 2천억원 규모의 전환사채(CB)를 발행해 만기도래한 BW 1억달러를 갚을 예정이었으나, 대주주들이 합의를 못보고 있는 상황이다. 하나로통신이 독자 생존할 방안은 2조원이 넘는 부채를 대폭 축소하고 KT와 유효경쟁을 통해 확고한 사업기반을 잡는 것.
그러나 삼성, LG, SK 등 대주주들의 이해관계가 지금처럼 첨예하게 대립한다면 유상증자나 외자유치 어느 쪽도 녹록지 않다. 특정 재벌그룹의 우산속에 있을 수 없는 분산된 지배구조탓이다. 채무해소만이 아니다. 계속 성장하려면 VDSL과 2.3GHz 휴대인터넷 등 신규 사업에 대한 방대한 투자가 이어져야 한다.
또 KT와 실제 경쟁하려면 KT의 시내전화망(가입자망)을 완전 분리, 모든 후발사업자들이 공평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하지만 이는 더욱 요원한 사안이다. KT는 지난해 민영화된 후 국내외 투자자들과 기업가치를 최우선시해야하는 상황이어서, 가장 큰 자산인 시내망 완전분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선출된 하나로통신 윤창번 신임 사장도 “주요 대주주들의 협조 아래 3천억원 정도의 단기 유동성 해소는 가능할 것”이라며 “그러나 공정한 시장룰을 위해서는 시내전화망 개방을 비롯한 비대칭규제 정책이 보다 강도높게 추진돼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자칫하면 하나로통신이 근본적인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 채 최악의 경영난에 내몰리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 부도까지도 예상하는 성급한 우려다. 그러나 현재로선 부도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법정관리로 갈 가능성도 그리 높아 보이진 않는다.
현재 위기상황을 촉발시킨 대주주들이 여론의 집중포화를 의식해 당장 필요한 최소 3천억원 정도의 자금은 어떤 식이든 해결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두루넷, 온세통신에 이어 하나로통신마저 법정관리로 갈 경우 유효경쟁정책 실패의 책임을 떠안게 되는 정책당국도 이런 상황까지 내버려두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효경쟁이라는 모양새만 갖추면 만족할 정부나, 독보적인 시장지위를 위협할 변수로 떠오르지 않고 지금처럼 제2의 시내전화-초고속인터넷 사업자로 머물길 바라는 KT-SK텔레콤, 하나로통신 인수만이 그룹의 살길이라고 여기는 LG의 행보가 엇갈리면서 하나로통신은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표류를 거듭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서한 전자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