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일 검찰에 소환되는 손길승 SK 회장. | ||
SK그룹이 다시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SK그룹은 지난달 말 그룹 오너인 최태원 회장이 7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 경영 정상화가 될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안정을 찾아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번에는 손길승 그룹 회장이 전격 검찰에 소환돼 충격속에 빠졌다. 특히 손 회장은 대검 중수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데 중수부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것은 정치권과 관련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 일부에서는 손 회장의 소환조사를 계기로 그동안 분식회계라는 경제사건에서 시작된 SK그룹 사태가 정치자금 문제로 비화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지난 2일 오전 10시경. 손길승 회장은 검정색 대형 승용차를 타고 대검찰청 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손 회장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청사 민원실 앞 계단에 서서 20초 정도 포즈를 취한 뒤 “조사에 순순히 응하겠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그는 “가능하면 기업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호소해 보겠다”며 다소 묘한 여운을 남겼다.
여기서 ‘기업의 어려움’은 그가 SK그룹 회장직 외에 수행하고 있는 전경련 회장직을 염두에 둔 말인 듯하다. 검찰이 혐의점을 두고 있는 것은 손 회장이 대표를 맡고 있는 SK해운이 지난 2000년과 2001년에 걸쳐 차입금 상환 명목으로 기업어음(CP)을 발행한 뒤 일부를 (주)아상이라는 회사의 채무 상환에 사용한 것처럼 장부를 조작,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 대검 중수부는 이 비자금의 일부가 정치권으로 흘러 갔다는 혐의를 잡고 수사를 벌여 이에 대한 단서를 일부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손 회장 소환과 관련해 “최태원 SK(주) 회장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이번에 문제가 된 SK해운은 손 회장이 줄곧 운영해왔다”고 밝혔다. 최태원 회장과의 연결성은 사전에 차단해둔 셈.
손 회장에 대한 검찰 조사는 지난 2일부터 4일 새벽까지 장시간 계속됐다. 당시 SK그룹에서는 연휴 기간이었음에도 대부분의 직원들이 출근했다. 검찰 주변에는 손 회장이 곧장 사법처리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다소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 지난달 보석으로 나온 뒤 선친 묘를 찾은 최태원 회장. | ||
그러면 손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 이와 관련해 SK그룹 관계자는 “아직까지 검찰에서 정확한 수사결과를 발표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정치자금 제공설에 대해 언급을 피했다. SK로서는 아직까지 검찰의 정확한 입장 표명이 없는 이상 섣불리 정치자금 등 항간에 나도는 얘기들에 대해 대응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SK의 한 관계자는 “사건의 핵심이 SK해운의 비자금 조성인지, 아니면 비자금의 용처인지 하는 부분이 중요한 것 아니냐. 정치자금을 받은 사람은 그냥 두고, 준 사람만 문제를 삼는다면 문제가 있다”는 묘한 발언을 했다.
현재 검찰 주변에서 오가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손 회장은 SK해운과 일부 계열사를 통해 조성된 비자금 가운데 지난 2000년 16대 총선 당시 1백여억원가량의 돈을 여야 의원 10여 명 등에게 건넨 부분과 관련해서는 순순히 인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검찰이 국정감사가 끝난 뒤부터 SK그룹으로부터 돈을 받은 여야 정치인들을 불러 청탁의 대가로 돈을 받았는지 등을 조사할 예정으로 전해지고 있는 부분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어쨌거나 현재 SK그룹은 손길승 회장의 구속이라는 최악의 사태만큼은 비켜갔다. 그러나 여전히 이 문제는 SK그룹에게 시한폭탄으로 남아 있다.
손길승 회장이 검찰의 조사를 받는 등 악재가 속출하면서 재계 안팎에서는 최태원 SK(주) 회장이 당초의 예상보다 빨리 그룹경영에 복귀하지 않겠느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손-최 쌍두체제에서 두 사람이 모두 빠진다면 그야말로 SK그룹은 풍랑속에 조타수가 없는 배와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룹 내부에서는 손 회장의 유고상황에 대비, 위기관리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손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해 최태원 회장의 구명을 위해 손 회장이 대신 짐을 진 것이라는 얘기도 없지 않다. 최 회장의 유고에 따른 경영손실을 감안, 손 회장이 대신 모든 책임을 지기 위해 나섰다는 시각인 것. 이에 대해 SK그룹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의 경우 아직 병원에서 요양중이고, 지금은 경영에 복귀할 시점은 아니라고 본다”고 항간의 관측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룹이 현재 위기속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 회장이 장기간 자리를 비워두긴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해 복귀시점에 대해 내부조율을 하고 있음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