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자금 조사를 받고 있는 재벌기업 주요인사들. 신격호 롯데 회장, 이학수 삼성 구조본부장, 이건희 삼성 회장,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구본무 LG 회장(오른쪽부터 시계방향). | ||
“공개할 것이 있으면 모두 공개할 것이다. 기업이 정치판의 동네북은 아니지 않는가.”(B그룹 관계자)
재계가 흥분하고 있다.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해 재벌총수 등 재계 핵심인사들의 검찰 소환을 앞둔 재벌들의 불만이 한계상황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가 삼성, LG, 현대자동차, 금호, 롯데 등의 비자금 수사로 이어지면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당초 대선자금 수사로 시작된 이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재벌그룹의 비자금 문제로 비화돼 정치권보다는 재계가 곤경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이다.
특히 LG, 삼성, 금호, 현대차 등의 계열사에 대해 검찰이 압수수색이라는 초강수를 두자 재계는 “사건의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번 검찰 수사의 목적이 정치자금을 수사하는 것이었음에도, 엉뚱하게 돈을 제공한 기업들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돈(정치자금)을 받은 쪽은 다 빠지고, 준 쪽만 트집잡는 것에 대한 재계의 불만이 팽배한 상황이다.
이렇게 되자 재계는 “우리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나름대로 히든카드를 준비하고 있다.
실제로 S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모든 것을 법대로 하면 될 것 아니냐”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 관계자는 “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수사가 아니라, 기업의 비리를 찾아내기 위한 표적수사라는 느낌마저 든다”고 주장했다.
이 인사의 이 같은 입장은 비단 한 기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또다른 S그룹, L그룹, K그룹 등의 고위 임원들도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는 A그룹의 고위 인사는 “검찰에서 모든 내용을 소상히 밝히겠다”고 결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재계의 현재 분위기는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속내를 모두 까발리겠다는 것이다. 만약 재계가 있는 그대로 입을 연다면 이는 정치권뿐만 아니라 재계, 법조계 등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재계 일부 인사들은 “이번 참에 정치자금 부분뿐만 아니라, 소위 도덕적이라고 평가받아온 집단들이 재벌, 특히 기업들과 어떤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공개하자”고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은 이학수 삼성구조조정본부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의 줄소환이 예고되면서 더욱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모습이다.
특히 구본무 회장과 이학수 본부장의 경우 검찰에 출두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정치자금을 포함한 재벌 비자금의 조성 및 용처 등과 관련된 폭탄발언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오가고 있다.
재계의 한 인사는 “대선자금을 수사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검찰의 수사가 대기업 비자금 수사로 확대된 이상,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정치권에 유입된 자금의 공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그렇다고 다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필요한 만큼 또는 검찰이 조사한 내용만큼은 확인해 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불법적인 정치자금 거래를 근절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대기업의 속살을 들여다보겠다는 치욕적인 상황이다”며 “조사를 받는 입장에서는 조사하는 사람의 의중을 나름대로 읽고 답변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검찰의 대기업 비자금 수사가 겨냥하고 있는 주요 타깃에 대해서만큼은 만족할 만한 수준의 폭로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나선 것이다.
비록 이 인사는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일정부분 수위조절을 하더라도 재벌 총수나 재벌의 핵심 관계자가 폭로성 발언을 할 경우 정·재계에 미치는 파장은 매우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특검법 거부’를 명분으로 단식투쟁에 돌입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표면상의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이 측근들에 대한 특검법을 거부한데 따른 반발이지만, 그 이면에는 대기업 전체를 옥죄며 한나라당에 제공된 대선자금 내역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검찰 수사에 대한 반발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검찰이 수사 강도를 높이며 대기업을 옥죄면 옥죌수록 한나라당의 투쟁 수위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이런 상황과 맞물려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에 대기업 관계자들이 결국 ‘앞뒤 가리지 않고 대선자금 제공 내역을 죄다 까발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안은 “재벌들의 폭로내용이 대선자금에 국한하지 않고 비자금 용처 전반에 대한 폭로가 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총수 소환을 앞두고 있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검찰 소환에 대비하면서 대선자금 제공은 물론, 지방선거, 그리고 2000년 총선 때 정치권에 제공한 자금내역까지 답변 자료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인사는 “우리가 정치자금 전반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검찰측의 요청에 의한 것이며, 기업으로서도 더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자체판단도 작용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대기업 관계자도 “대선자금 제공 내역은 검찰이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이제는 대선 이전에 정치권으로 건너간 자금에 대해서도 자료를 확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검찰 소환에 대비해 대선자금 제공내역은 물론, 지방선거와 총선 당시 정치권에 건너간 자금내역까지 자료를 확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재계의 움직임은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의지와 맞물려 또 다른 ‘핵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 이후 제2의 뇌관이 ‘총선자금’임은 이미 예고돼 있는 부분이다.
물론 검찰 수사가 불러올 폭발력은 검찰의 수사의지와 함께 재계에서 어느 정도 ‘협조’를 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재벌 비자금 전반으로 검찰 수사가 확대되면서, ‘깔 건 까겠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돌변한 재계의 입장이 맞물리면서 정치권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