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604호(2003년 12월14일자)에 ‘신격호 회장 정·관계 커넥션 해부’라는 기사가 게재된 직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익명의 독자는 <일요신문> 기사에 언급됐던 나카소네 전 일본 수상과 롯데와의 특별한 관계, 신 회장과 국내 정치인들과의 각별한 교분을 입증해주는 사진을 제공하겠다고 제보했다.
독자가 보내온 사진에는 국내 정·재계 최고 실력자들과 일본 정계 최고 막후 실력자인 나카소네 전 수상이 함께 찍힌 것으로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재벌총수와 유력 정치인들의 ‘교류 현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 김종필 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 신격호 회장, 임춘원 전 의원의 모습(왼쪽부터). 신 회장의 오른쪽 뒤로 나카소네 전 일본 수상과 최영근 전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 ||
의문은 왜 이런 한일 양국의 정계 실력자들과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재벌 총수가 함께 자리를 같이 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왜 이런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일까하는 의문도 제기됐다. 언제,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이유로 이들은 함께 자리를 한 것일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사진 제보자는 사진이 찍힌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함구했다. 결국 그에 대한 답은 사진 속에서 찾아 볼 수밖에 없다. 이 사진 속 등장인물은 김종필 현 자민련 명예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 신격호 회장, 나카소네 총리, 최영근 전 의원, 임춘원 전 의원 등이다.
사진 배경에 레이크 뷰(Lake view)라는 상점 간판이 보인다. 또 배경에 모노레일 같은 놀이기구가 보인다. 이런 점에 미뤄 이 사진의 촬영장소는 잠실 석촌호숫가에 세운 롯데월드 야외놀이시설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짚어볼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신격호 회장이 나란히 사진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 신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내에 진출했다는 사업이력을 감안하면 그는 김종필 명예총재(JP)나 그의 일본내 인맥으로 분류되는 나카소네 전 수상과 나란히 서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야당 정치인 DJ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에 등장하는 롯데호텔 잠실점은 88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문을 열었고 어드벤처 시설은 89년 7월 공식 개관했다. 또 최영근 전 의원과 임춘원 전 의원이 DJ 옆에서 측근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찍힌 것으로 봐서 적어도 91년 이전 사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 사진의 촬영시점은 롯데호텔 잠실점이 문을 연 88년 9월 이후부터 91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롯데월드 개관을 전후한 시점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사진이 촬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88년 당시 국내 정국은 헌정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지던 때였다.
이 여소야대 정국에서 승자는 DJ였다. 88년의 여소야대 정국은 DJ가 주도권을 쥐고 흔들었던 것. DJ는 정치 인생 중 세 번의 절정을 맛보고 있었다. DJ 절정기의 첫 번째는 71년 대선에서 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패한 것이고, 두 번째는 88년 평민당이 여소야대 정국에서 원내 제1야당이 된 것, 세 번째는 97년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에 취임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88년 여름부터 91년 3당합당 때까지 DJ는 두 번째 전성기를 누렸고 이 사진은 적어도 그때의 DJ의 모습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이 사진에는 당시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고 있던 4정파 중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정치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날의 행사가 공식행사였다면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나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총재에 버금가는 민정당 총재대행이나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참석하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김종필 현 자민련 명예총재와 DJ, DJ의 측근, 그리고 나카소네 전 수상만이 카메라에 잡혀 있고, 중심인물로 DJ와 신격호 회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이날 행사가 공식적인 성격의 자리는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사진을 보면 긴장한 표정의 신 회장은 그의 평생 후원자나 다름없는 JP나 나카소네 전 수상을 제쳐두고 DJ 옆에서 두 손을 모아쥔 채 에스코트를 하고 있다.
이와 관련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했던 전직 의원 A씨는 “13대 국회 때 DJ의 평민당에서 롯데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일본 롯데의 국내 진출에 부여된 과다한 특혜와 부동산 투자 문제, 과실 송금, 신 회장 자녀의 국적 등 문제가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88년 정기국회 때 이 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되자 신 회장이 평민당쪽 중견 의원을 접촉하는 등 비상이 걸리고, 결국 나카소네 전 수상이 일본에서 날아와 뒷수습을 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A씨의 이런 증언은 이 롯데월드 회동 시기와 성격에 대해 주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DJ가 89년 하반기에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과 1만달러 수수설이 터져 궁지에 몰리면서 대외활동을 삼가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DJ와 신 회장, 나카소네의 롯데월드 회동 시기는 DJ의 정치적 영향력이 한껏 고무됐던 88년 9월 국정감사 기간부터 89년 여름 이전으로 좁혀지는 셈이다.
나카소네 전 수상의 등장도 그런 맥락에서 의문이 풀리는 셈이다. 즉 DJ와 신 회장의 관계가 파열음을 내던 시기에 JP와 나카소네가 함께 회동을 했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 것. 그렇다면 JP와 나카소네 전 수상이 이들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와 관련해 전직 의원 A씨는 “DJ와 신 회장이 맞대면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국내 정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정치인과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재력을 갖고 있던 재벌 총수의 만남에 JP와 나카소네 등 한일 양국 거물급 정치인이 동원됐다는 얘기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최영근 전 의원은 경주 출신으로 울주 출신인 신 회장과 동향. 사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롯데쪽의 하아무개 부회장도 이날 모임 주선에 깊숙이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계통에서 일했던 관료 출신인 하 부회장은 롯데에 스카우트된 뒤 대관업무를 전담했던 인물로 3공화국 인맥으로 분류됐던 인물로 알려졌다.
또 DJ 옆에서 가슴에 꽃을 달고 등장한 임 전 의원 역시 당시 DJ 캠프의 재무사정에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진 측근이라 JP-나카소네 전 수상-신 회장-최영근-임춘원-DJ로 이어지는 이날 모임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A씨는 그 날 회동 이후 당시 제1야당과 롯데간의 갈등이 더 이상 돌출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신 회장의 두 아들 중 한 명이 한국 국적을 택한 것도 그때쯤이라는 것.
롯데가 74년 현재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부지를 사들일 때부터 정부의 특혜성 지원에 힘입었다는 것은 그간 수차례 관계 공무원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는 당시 실권자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79년 10·26 이후 국내 정계는 야권의 파워가 커지고 급기야는 88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졌다.
3공화국 때 국내에 진출했던 신 회장도 국내 정세 변화에 어쩔 수 없이 대응했어야 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진은 지난 80년대 후반에 펼쳐진 정계와 재계의 비밀을 풀어내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