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박의 좌장 격인 김무성 원내대표가 사실상 ‘친이’로 돌아섰다. 박근혜 전 대표의 측근들이 최근 친이계 의원들을 접촉하는 것을 두고 일종의 ‘경고’로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오히려 박 전 대표는 지방선거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게 대다수 친박 인사들의 전언이다. 7월 재·보궐 선거, 전당대회, 개헌 등 대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치 일정에 알람시계를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엔 박 전 대표와 그의 핵심 측근들이 TK(대구·경북) 및 수도권 친이 의원들을 자주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가에선 이를 당내 세 확장 및 친이계 흔들기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그동안 여권 주류의 공세에 ‘침묵’으로 일관해 온 박 전 대표가 ‘역공’에 나선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지원유세를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 4월 20일 출입기자들과의 비공개 오찬에서 6·2 지방선거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기자는 “(박 전 대표가) 지방선거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7월에 치러지는 재·보궐 선거와 관련된 얘기에 귀를 더 기울이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이번 지방선거 공천 과정에서 예상과 달리 계파 간 대립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것 역시 친박 수장인 박 전 대표의 이러한 스탠스 때문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한나라당 중도성향의 한 의원은 “경남지사 후보 선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친이 간 다툼이 더 심하지 않았느냐. 몇몇 지역구에서 마찰이 있었지만 친박 내부에서 스스로 정리했다. 박 전 대표가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겠지만 지방선거와 거리를 두고자 하는 친박 내부 기류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가에서는 이를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정국 이후 보여준 ‘침묵 정치’의 연장선상으로 해석한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막이 오를 대권 레이스를 앞두고 최대한 전투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 자문그룹에 몸담고 있는 한 교수는 “세종시 공방에서 친박 의원들을 이끌었던 박 전 대표가 올해 2월부터는 정책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의원총회에는 자주 나가지 못하지만 상임위원회는 꼭 출석해서 자신이 제시한 정책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체크하고, 또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낸다. 지금은 교육 분야에 관심이 많아 후반기 국회에서는 관련 상임위를 신청할 것으로 안다. 또한 전문가들과 함께 개헌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박 전 대표가 교육과학기술위원회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박 전 대표는 지난 3월 초 측근들에게 세종시법을 놓고 여권 주류와 ‘퇴로 없는 전쟁’을 벌이면서 약점으로 지적됐던 몇몇 사안들에 대해 개선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정책 부문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대안은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발목만 잡는다’는 인식이 국민들 뇌리에 심어졌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내부로부터 나왔다는 후문이다. 당시 몇몇 친박 의원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사업, 세종시 추진 등과 확연히 구별되는 미래지향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공약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일부에선 세종시 정국에서 지나치게 ‘고집스런’ 태도를 보였던 것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한 친박 의원은 “박 전 대표에게 ‘강경론’을 역설했던 최측근 인사가 언제부터인지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대신 출구전략까지 거론하며 ‘신중론’을 펼쳤던 TK 지역 A 의원이 지금은 핵심 중 핵심으로 불리고 있다. 박 전 대표 역시 대권을 위해서는 조금씩 변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가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특히 박 전 대표는 당내 기반 확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략통’으로 꼽히는 한 친박 의원 보좌관은 “박 전 대표 지지자들은 ‘로열티’가 가장 높다. 아무리 박 전 대표가 실수를 해도 지지율 30%는 나올 것이다. 세종시 문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대선은 그것만으론 안 되지 않느냐. 외연을 넓혀야 한다”면서 “이 대통령과 맞붙었던 지난 경선에서 박 전 대표는 국민투표에서 뒤진 것보다 당 내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 것을 더 아쉬워했다. 따라서 차기 경선에서는 아예 경쟁자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의 당내 지지를 확보하려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몇몇 친박 의원들이 세종시 문제를 놓고 불협화음을 냈던 것도 박 전 대표로 하여금 세 확장에 나서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최근 들어 박 전 대표와 핵심 측근들이 친이계 인사들과 접촉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배경 역시 이러한 내부 사정을 바탕으로 바라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한나라당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로 여겨지는 박 전 대표이지만 주류에 비하면 세가 열세인 게 사실이다. 대선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비주류 수장이 겪어야 할 어려움은 더욱 커질 것이란 점도 박 전 대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대권 행보 전에 최대한 세력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박 전 대표가 최근 들어 보폭을 점차 넓히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정치 컨설턴트는 박 전 대표 측의 이러한 움직임을 전해 듣고 ‘1석 3조를 노린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세를 늘리는 것이 최우선 목표일 것이다. 개헌, 전당대회 등 정권 후반기에 의원들 지지가 필요한 일정이 줄줄이 있지 않느냐. 이뿐만 아니라 박 전 대표는 친이계 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포용성 부족’이라는 지적을 극복할 수 있고, 친이계 내부를 흔드는 효과도 부수적으로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일요신문>은 복수의 친박 의원 및 한나라당 관계자들로부터 구체적인 사례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앞서의 친박 핵심 A 의원은 지난 4월 23일 TK 지역 B 의원과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함께했다. 동향 의원들 간 만남인지라 그리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주목할 대목은 당시 A 의원이 B 의원에게 건넸다는 말이다. B 의원 사무실 관계자는 “평소 그리 친한 관계도 아니었는데 A 의원이 먼저 만나자고 해서 나간 자리였다. 술도 몇 순배 돌고 화기애애한 자리였는데 A 의원이 ‘정권 재창출보다 앞서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기 위해선 지금으로선 가장 유력한 박 전 대표를 밀어야 한다. 박 전 대표가 B 의원을 지켜보고 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는 게 정치인의 또 다른 덕목’이라고 말했다”면서 “B 의원 역시 상당히 고심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TK 지역의 한 친이 의원 보좌관 역시 비슷한 경험을 털어놨다. “친하게 지내던 한 친박 의원 보좌관이 내가 모시고 있는 의원을 뵙고 싶다고 해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그 보좌관뿐 아니라 의원도 같이 나왔다더라. 특별한 얘기는 없었는데 그 친박 의원이 우리 의원에게 ‘박 전 대표를 많이 도와 달라. 힘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그때는 별다른 점을 못 느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뭔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고 귀띔했다.
이밖에 최근 박 전 대표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수도권 친이계 의원 두 명의 모습이 포착돼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동안 박 전 대표가 친박 의원들을 사무실로 불러 현안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환담을 나누는 장면은 심심찮게 있었지만 친이 의원들은 처음이라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에 대해 한 친이 의원은 “박 전 대표는 상임위에서 활동할 때도 친이계 의원들과 많은 얘기를 주고받는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친박 측이 최근 우리 쪽 사람들과의 접촉 빈도를 늘리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내부 단속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친박 내부에서는 박 전 대표와 핵심 측근들이 친이계 중에서도 TK 지역 의원들을 집중적으로 접촉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TK 지역 ‘맹주’라고도 할 수 있는 박 전 대표 영향력을 현지 친이 의원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년 총선을 앞두고 박 전 대표 지원이 절대적으로 아쉬울 법한 TK 지역 의원들로서는 박 전 대표가 내민 ‘손’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친박 측의 판단이다. 또한 TK 지역 의원들이 ‘물꼬’만 터주면 수도권 등 타 지역 친이 의원들에게도 ‘연쇄효과’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의도의 한 정치컨설턴트는 “박 전 대표가 (어느 정도) 친이 의원들 ‘포섭’에 성공한다면 대선에 가까울수록 유력 주자에게 의원들이 쏠리는 현상과 맞물려 큰 시너지 작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러한 박 전 대표 움직임을 여권 주류의 공세에 대한 ‘역습’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한때 친박 좌장으로 불렸던 김무성 원내대표가 사실상 친이로 ‘변절’했고, 박 전 대표 지지 세력의 대명사 격인 미래희망연대(구 친박연대) 역시 친이계의 압박과 회유 속에 합당을 선언하자 박 전 대표가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동안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과 친박연대의 합당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한 친박 의원은 “(친이 끌어안기는) 주류에 대한 경고 차원으로도 볼 수 있지 않겠나.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겠다는 박 전 대표 의지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