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년 1월 당시 이종찬 안기부 부장이 국정감사에 나와 답 변하고 있다. 이 부장의 ‘정치적 행보’는 개혁의 와중에서 동요하던 안기부를 더욱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 로 알려졌다. | ||
안기부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이종찬 안기부장은 8월께 청와대 주례보고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김정일의 주석 취임 가능성을 보고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김 대통령은 세 가지 이유를 들면서 ‘주석 취임 불가론’을 제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이 북한 경제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외빈 접견 등 공식행사에 나가기를 꺼리는 성격이며, 남북간 정상회담이 열려도 참석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게 김 대통령의 설명이었다고 한다.
안기부의 대북 정보력이 김 대통령의 통찰력을 당해내지 못하는 수준임을 드러냈던 셈이다. 이는 DJ정권이 뜨자마자 인적청산, 국내정치 불개입 등의 대개혁을 단행했던 안기부가 대북정보 수집능력에서 구멍이 뚫렸다는 점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사건이다.
당시 안기부 고위 관계자는 “솔직히 북한 헌법이 바뀐다는 고급 정보를 전혀 입수하지 못했다. 고급 비선 라인이 전혀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부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안기부는 북한 관련 고급정보는 중국 군부나 연변지역 고위 관리들을 통해 수집해 왔었다. 그 방식은 이른바 ‘현찰 거래’였다. 문제는 정권이 교체되면서 안기부 예산이 대폭 삭감된 데서 비롯됐다. 정권 출범기 안기부 기조실장을 맡았던 이강래씨는 투명한 예산집행을 명분으로 내세워 예산 삭감, 예산전용 불가 등의 규칙을 만들었다.
더욱이 김대중 대통령이 안기부의 국내정치 불개입을 강조함에 따라 공식적으로 국내파트는 위축됐으나 물밑활동은 지속됐다. “김 대통령이 사정 및 정치 등에 관한 안기부의 보고에 대해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때문에 국내파트는 해외파트 중 대공부문의 공작비를 ‘편법’으로 끌어쓰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희대 교수 출신인 나종일 1차장이 담당하던 해외파트는 대북, 국제경제, 과학기술정보, 마약범죄, 첨단테크놀러지 등으로 구성돼 있었고 그 중 대북파트는 인력 및 자금면에서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 국내파트쪽으로 자금까지 들어가는 설상가상의 형국이었다. 대공파트의 자금력, 정보력은 취약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그러한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사단이 벌어졌던 셈이다.
공조직인 안기부의 대북정보 및 창구가 약화되자 대북 브로커들이 기세를 부리는 현상도 벌어졌다. 97년 대선 때 북경에서 북측 관계자들을 만나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던 총풍사건의 ‘주범’격인 장석중씨가 DJ정권 초기 총풍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활동을 계속했던 것은 대표적 사례다. 장씨는 옥수수 박사 김순권씨의 방북을 주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총풍사건’의 장본인 장석중씨. | ||
이종찬 안기부장 등 고위층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해, 10월 정기국회에서 안기부의 예산 및 기능을 확대하는 쪽으로 안기부법 개정안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당시 안기부 내에서는 “개혁의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았을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 많았다.
안기부 직원의 11%를 감축하고 대규모 보직해제 조치를 취한 것도 안기부의 전력약화를 초래했던 요인으로 지적됐다. 당시 안기부의 전직 고위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안기부 개혁을 하면서 퇴직한 사람말고도 1천여 명 정도가 보직해제 발령(대기 발령)을 받았다. 그들은 대부분 부적격자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불운한 케이스다. 조직의 허리인 과장급들도 부지기수다. 국내정보 파트에 그친 게 아니다. 대공수사 및 대북정보 수집파트도 많이 당했다. 총풍사건의 소용돌이가 영향을 준 탓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인재들이 안기부에서 퇴출되면서 빚어지는 결과는 자명하다. 대북정보력의 약화다.”
1천여 명의 대기발령자들은 안기부 내 조직 동요와 정부 내 대북정책의 혼선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빚기도 했다. 그들은 우선 명예퇴직 형식을 밟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 명예스럽게 퇴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 퇴직금 이외에 평균 5천여만원 정도의 ‘명퇴금’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기부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기발령자들 중 일부는 당시 현대와 통일그룹 간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금강산 관광사업 진출 무대에 뛰어들었다. 통일그룹은 당일코스로 금강산 입장료가 1백달러였던 데 비해 현대는 2박3일에 입장료가 3백달러 수준이었다. 통일그룹은 물먹은 대북파트 직원들 상당수를 고용해 안기부 내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활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기부 내 구 인맥은 통일그룹에 우호적인 게 당연한 측면도 있었다. 통일그룹은 YS정권 시절에 문선명 회장이 방북해 김일성을 면담해 대북사업 독점권을 약속받고 그 대가로 엄청난 달러를 지급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 과정에서 안기부측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안기부는 DJ정권 하에서도 통일그룹을 대북 사업자로 지원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종찬 부장조차도 98년 10월 내부 북한 정세보고회에서 “정부가 현대쪽에 과도하게 우선권을 주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개인적으로 통일그룹의 1일 금강산 관광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본다”고 밝혔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청와대와 통일부는 현대를 미는 분위기였다.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특히 현대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임 수석은 98년 10월 중순 사석에서 “현대가 대북사업을 하는 것을 보면 스케일이 크다. 전체 사업 중 금강산은 미끼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측은 안기부 인맥이 취약하다는 점을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98년 10월 세종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있던 손장래 전 안기부 2차장을 현대정공 고문으로 영입한다. 손씨는 현대측의 대북사업 및 안기부용 인맥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안기부 조직이 개혁바람으로 동요하는 와중에 전·현직 직원 및 간부들이 현대와 통일그룹 간의 금강산 사업권 쟁탈 전쟁에 동원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청와대가 안기부의 탈 정치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정치도구화한다는 안기부 내 불만도 높았다. 특히 안기부는 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측이 북측에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총풍사건’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청와대측과 갈등을 겪었다.
▲ 집권 후 안기부에는 개혁의 바람이 몰아쳤다. 예산 삭감과 대규모 인원 감축으로 정보력이 약해진 것은 이러한 개혁의 부작용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북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기도 했다. | ||
문제의 구절들은 DJ가 패배한 역대 대선의 총풍의혹들을 명기한 것이다. 따라서 청와대로서는 총풍으로 규정하고 싶은 반면 안기부로서는 과거의 ‘전과’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DJ가 안기부의 탈 정치화를 선언해놓고 정략의 틀 속에 가둬두려고 했다는 비판을 받을 만한 대목이다.
이종찬 부장의 ‘정치적 행보’도 안기부 내부를 흔들었다. 수시로 기자들을 만나 국가기밀에 해당되는 사안들을 털어놨고 종로 지구당 행사에도 빈번하게 참석했다. 안기부장의 최대 과제가 북한문제인데 이 부장은 정치문제에 매달린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세풍사건의 주범인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자 이종찬 부장에게 국세청장 자리를 청탁했다는 풍설도 떠돌았다. 이석희씨는 92년 대선 당시 이종찬씨가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을 때 자신을 ‘산부인과 의사’라고 소개하면서 스폰서 역할을 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이 부장도 세간의 소문을 의식한 탓인지 안기부 내 공보팀에 “나에 대한 시중여론을 가감 없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기부 수사팀의 수사 관행도 수 차례 타깃으로 떠올랐다. 97년 대선 때 총풍사건의 주범격인 장석중씨가 고문의혹을 제기하면서 의외의 사실이 드러났다. 안기부 수사팀이 장씨 수사를 마치고 시내의 단란주점으로 함께 가서 질펀하게 술자리를 즐겼다는 것이 안기부측이 단란주점 종업원을 증인으로 채택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안기부 고위 당국자는 “증인으로 나온 단란주점 사장과 여종업원이 장석중을 기억하는 것은 그의 ‘연변춤’ 때문이다. 장석중은 술을 마시면서 행패도 부렸고 나중에는 옷을 벗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 ‘요게 연변춤’이라며 춤까지 췄다. 그때 고문을 당했다면 그렇게 놀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하지만 이 같은 안기부측 주장에 대해 장씨는 재판과정에서 “술로 어혈을 풀어 고문흔적을 없애기 위해 나를 강제로 술집에 데려갔던 것”이라며 “춤을 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장씨는 현재 고문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진행중이다).
안기부 수사를 받던 중 중앙일보사로 달려가 ‘고문’당했다고 호소했던 ‘북한 공작원 C씨 사건’도 술자리가 화근이었다. 안기부 수사팀은 C씨를 조사한 뒤 함께 소주를 10여 병 이상 마셨다고 한다. 대취한 C씨는 수사관들과 대판 싸워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신문사로 달려가 “고문당했다”고 호소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안기부가 개혁을 외쳤지만 조직의 동요로 인해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부작용을 겪었던 것이다.
DJ정권 초기의 안기부의 개혁이 어두운 구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자적인 대북 정보 역량 강화를 위해 외국과 3개의 상업 인공위성 사용 계약을 체결하고 북한 전 지역을 감시하는 체제를 도입했다. 덕분에 이 부장은 98년 8월 중동 방문에 나서기 전에 김 대통령에게 9월 중 북한의 미사일 또는 인공위성 발사 가능성을 보고했고, 북한은 그 시기에 인공위성을 쐈다.
DJ정권의 안기부 개혁이 DJ 자신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안기부의 한 실무 책임자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야당 할 때는 모두 안기부의 정치적 독립을 외치지만 권력을 잡으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다. YS 때도 그랬고 DJ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 느낌이다.
YS의 경우 취임 후 첫 보고를 받고 나서 분위기가 변했다. 대통령의 생각이 달라진 것 같자 안기부가 올리는 국내정보 및 인물존안자료 내용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DJ가 안기부의 정치적 독립을 이뤄내려면 그에 걸맞은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도부를 개혁적 인사로 포진시키고 국내정치파트를 폐지하겠다며 개혁의지를 과시하고 있지만 DJ정권의 사례는 간과해선 안될 교훈이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