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리를 활짝 벌리고 앉는 일명 ‘쩍벌남녀’는 지하철 출퇴근길의 공공의 적이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출근길이 매번 다이내믹하진 않겠지만 대부분 직장인들은 가끔씩 동료들에게 신나게(?) 해줄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가장 흔한 건 역시 개념이 탑재되지 않은, 이른바 ‘무개념 인간’과 마주치는 일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개인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는 산뜻한 아침을 방해한다. 외식 프랜차이즈에 근무하는 Y 씨(여·33)는 요즘 출근길이 죽을 맛이다. 급히 먹고 나온 아침 식사를 게워낼 지경이다.
“메뉴 개발 업무를 하고 있는 데다 전공도 요리 쪽이어서 평소에도 코가 예민한 편이에요. 요즘은 이 민감한 후각 때문에 출근길이 고역이네요. 그전에는 늘 같은 시간, 위치에서 지하철을 타도 꽉 끼이기만 했지 크게 신경 쓰이는 건 없었는데요, 얼마 전부터 참을 수 없는 냄새가 계속 나는 거예요. 분명한 방귀냄새인데, 처음 한두 번은 그냥 좀 참자했는데 한 달을 매일 아침마다 지독한 냄새를 맡으려니 죽겠어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좁은 공간에서 기본적인 에티켓은 지켜야죠.”
의류업계에 종사하는 C 씨(여·29)도 출근길에 안하무인의 여성을 만났단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가 맨 뒷자리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앉았어요. 다음 정거장에서 어떤 여자 분이 타시더니 가뜩이나 자리도 좁은데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서 앉는 거예요. 그러더니 옆 사람들에게 좀 좁혀 앉으라는 식으로 눈치를 주면서 다리를 벌리고 자리를 넓히더라고요. 이후가 더 가관이었죠. 기초화장 이후의 모든 메이크업 단계를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처리하는 거예요.”
버스 안에서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사태를 경험한 직장인도 있다. 일산에서 서울 구로 디지털단지 내 IT 관련 회사까지 1시간 이상 출근해야 하는 L 씨(29)에게는 이른 아침의 빈자리가 너무 소중하다. 그러나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듯 자리를 ‘탈환’하기까지는 난관이 만만치 않다.
“어떻게 해서라도 앉아 가고 싶어서 한 정거장을 거꾸로 가서 버스를 타요. 그럼 좀 한가하거나 운이 좋으면 자리가 있거든요. 한번은 점찍어둔 학생 앞에 섰고 다행히 두 정거장 지나 내리기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한 여자 분이 번개처럼 나타나 가방을 놓더니 막 타는 친구한테 ‘○○야, 얼른 와’ 그러는 겁니다. 순간 너무 열이 나서 한 소리 할까 하다 꾹 참았는데 그 뒤에는 다른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둘이 수다를 떨더군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요. 그러다 며칠 뒤 다시 그 일당을 만났습니다. 이번에도 가방을 올려놓고 친구를 부르기에 망설임 없이 그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제가 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들었죠. 두 여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통쾌한 마음으로 편히 앉아 왔습니다.”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별다를 것 없는 출근길에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사람들도 있다. 섬유회사에 근무하는 J 씨(여·32)는 아침마다 묘한 커플을 만나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지하철은 보통 같은 시간대에 같은 위치에서 타잖아요? 그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낯이 익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늘 보는 커플은 아마 그 칸에 타는 사람들은 다 알 걸요? 정말 지치지도 않는지 타기만 하면 늘 싸워요. 보아하니 결혼한 커플은 아닌데 항상 같이 타죠. 싸우는 내용도 비슷해요. 남자가 ‘내가 부장한테 받는 스트레스보다 너한테 받는 스트레스가 더 커!’ 이러면 여자는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는 식이죠. 이렇게 다 들릴 정도로 싸우던 커플은 환승역에서 내려 갈라지는데요. 글쎄, 내리기 전까지 치열하게 입씨름을 하던 커플이 기둥 앞에서는 키스를 하고 헤어지는 거예요. 사랑싸움은 칼로 물 베기가 맞는가봐요.”
부동산업계에서 일하는 S 씨(31)는 정말 낭패스런 일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
“그날따라 웬일인지 자리가 딱 나더라고요. 일진 좋은 날이다 싶었죠. 앉아서 한두 정거장을 갔는데 30대 중반 남자분이 제 앞에 섰어요. 타자마자 가방을 제 자리 위 선반에 올리더군요. 그러고 몇 정거장을 갔는데 갑자기 머리 위가 축축한 겁니다. 그 남자 분 가방에 있던 녹즙 봉지가 터진 거였죠. 마침 가진 손수건도 없고 휴지도 없는 상황이라 너무 난감했습니다. 흰색 와이셔츠는 녹색으로 물들어 가고…. 한 아주머니가 휴지를 주셔서 닦긴 했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라 상대방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답이 안 나오더군요.”
K 씨(여·28)도 얼굴 벌게지는 창피한 일을 출근길에 겪었던 주인공이다. 평소 시각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그는 변비로 고생하고 있었다.
“하루는 버스에 탔는데 제 앞에 앉아있는 아주머니가 자꾸 제 배를 힐끔 힐끔 보는 거예요. 안 그래도 항상 배가 더부룩하고 부어있듯 불러 있어서 신경 쓰이는데 계속 쳐다보니 거슬렸죠. 그러더니 갑자기 저한테 ‘새댁 배불러서 힘들겠네. 여기 앉아’ 하시더군요. 버스에 사람도 별로 없었고 누가 봐도 제 옷차림은 20대의 미혼 여성이었는데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셔서 당황스러웠어요.”
K 씨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다음 정거장에서 그냥 내려버렸다. 화가 났지만 호의를 베푼 아주머니를 탓할 수도 없어 애꿎게 자신의 배만 원망해야 했다.
지옥철과 만원버스로 묘사되는 출근길. 이리저리 치이고 낭패스런 일을 겪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불평만 하면서 출근할 수는 없는 일. 나름대로 위안거리를 찾는 것이 낫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N 씨(여·26)는 나름의 해결책을 찾았다. 좀 더 일찍 출근하는 것이 그의 방법이다. 여유 있게 출발하니 마음도 편하고 한적해서 좋단다. 그는 “한번은 지하철에서 바닥을 열심히 기어가는 꽃게를 보기도 했다”며 “매일 특별한 경험을 할 순 없지만 출근길 자체를 즐기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