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회장이 중국공장에서 생산된 기아차 포르테의 품질을 점검하고 있다. |
현대·기아차그룹 내부 현대차와 기아차, 두 계열사 간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좀 과장해 빗댄 얘기다. 최근 현대차와 기아차가 연이어 내놓은 동급 모델 신차 발표 경쟁이 과열 양상을 보이면서 현대·기아차그룹 주변에서 논란이 일었다. 정몽구 회장까지 나서서 둘 사이의 경쟁 자제를 당부했다는 말이 들릴 정도다.
지난 3월 24일 기아자동차는 서울W호텔에서 크로스오버차량(CUV)인 스포티지R의 신차 발표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스포티지R은 세단의 장점인 승차감을 살리면서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장점인 적재공간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스포티지R은 신차발표회 이후 무엇보다 형제 계열사인 현대차에서 앞서 출시했던 투싼ix와 크게 비교됐다. 스포티지R은 외장 디자인은 차치하고라도 차체자세제어장치(VDC)와 운전자 동승석 에어백 등을 기본으로 장착했다는 점 등에서 투싼ix를 넘어설 차량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후 불과 1주일 만인 3월 31일, 현대차는 투싼ix 2011년형 업그레이드 모델을 출시했다. 현대차는 신형 모델이 “제동 및 조향기능을 통합적으로 적용해 제어 차량의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시켜주는 ‘샤시통합제어시스템’을 적용한 모델”이라며 “기존의 모델보다 안전성 측면에서는 몇 단계 업그레이드된 차량”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외적인 평가는 사뭇 달랐다. 투싼ix의 2011년형 업그레이드 모델 출시는 기능의 향상보다는 현대차의 기아차 견제 목적이 더욱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 것이다. 후속 모델 출시 시점이 유례없이 빠른 시기에 이뤄졌다는 점은 이런 관측에 힘을 싣고 있다. 투싼ix가 시장에 첫 선을 보인 것은 지난해 8월. 불과 8개월여밖에 되지 않은 시점인 올 4월에, 그것도 기능면에서 스포티지R에 적용된 VDC를 적용한 것 외에는 큰 차이가 없는 후속모델을 내놓은 까닭에서다.
기존 현대차의 업그레이드 모델 출시일은 국제적인 모터쇼 등에 신차종 후속 모델을 선보이는 경우를 제외하고 하반기로 잡는 것이 보통이었다. 실제로 투싼ix 같은 현대차의 SUV 모델들의 공개 시점을 살펴보면 2005년형 싼타페 업그레이드 모델은 2004년 8월에 출시했다(보통 ‘○○년형’이라고 말하는 자동차 연식은 출시 연도가 아니라 회사의 명명에 따른다). 베라크루즈 2008년형은 2007년 11월에 발표했다. 또 ix 출시 이전 모델인 투싼과 아반떼 2009년형은 2008년 10월에 발표했다. 이처럼 수년간 현대차에서 다음해 후속 모델을 발표하던 시기가 대부분 그해 8월 이후로 맞춰져 있었다.
사실 이 같은 현대차의 기아차에 대한 견제 양상은 앞서 중형차 시장에서 이미 한 차례 선보인 적이 있다. 기아차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쏘나타YF 모델을 내놓으면서 현대차가 ‘최초’로 도입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사이드 커튼 에어백이 사실은 기아가 지난 4월 29일 공개한 K5(쏘나타와 동급)에 국내 최초 적용을 계획하고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대차가 앞서 출시했던 쏘나타YF를 통해 선수를 치는 바람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
1분기 국내시장에서 줄곧 준대형 차량 1위를 지키던 그랜저TG는 1만 2655대가 팔려 기아차가 동급 시장을 겨냥해 내놓은 K7(1만 3409대)에 밀렸다. SUV 부문에서도 기아차의 쏘렌토R이 1만 1419대가 팔리면서 동급인 현대차의 싼타페(1만 627대)를 앞질렀다. 싼타페는 1월부터, 쏘렌토R은 3월부터 시판된 것을 기준으로 판매량이 집계된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판매율이 크게 뒤진 것이라는 평이다.
이제껏 형제간의 경쟁에서 실적으로 형님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현대차로서는 이런 기류가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현대차의 기아차 견제 현상을 ‘황태자의 자리바꿈’과 연결 짓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8월 21일 정몽구 회장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직을 그만두고 현대차로 영전했다. 정 부회장은 약 한 달 뒤인 9월 17일 쏘나타YF 신차발표회에 참석해 “신형 쏘나타는 향후 글로벌 전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면서 현대차에 힘을 실었다.
물론 이들 회사의 견제가 악영향을 불러오고 있다는 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두 회사의 이런 경쟁 구도가 오히려 장기적인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차지한 탓에 내부 견제와 경쟁이 앞으로 성장에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두 회사 간의 과열된 경쟁구도가 상호간에 깊은 감정의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얘기가 눈길을 끈다. 현대차의 한 관계자는 “모 업체 사장이 기아차 공장을 방문할 때 현대차를 타고 오자 입구에서 경비원이 제지했다. ‘내려서 걸어가시는 게 좋겠다’고 해 그 말을 따른 적도 있다고 한다”며 “요즘에는 이런 일이 있을 만큼 두 회사가 ‘우애’보다는 서로 견제하고 다투는 ‘경쟁자’로만 바라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과열된 경쟁 양상은 자칫 대외적으로 ‘형님’과 ‘아우’의 대립이라는 부정적 시각을 불러 모을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편 이처럼 과열된 경쟁 구도를 보이는 두 계열사를 두고 정몽구 회장이 직접 나서 자제를 주문했다는 말도 들린다. 현대차의 한 관계자는 “내부에서도 견제가 지나치게 치열하다보면 소모적인 다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평이 많았다”며 “최근 정몽구 회장이 현대와 기아 측 임원진에게 ‘차별화된 콘셉트를 가지고 신차를 개발하고 동급 모델의 쓸데없는 상호경쟁을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