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지검 형사5부(한동영 부장검사)는 지난 5월 6일 도시정비업체 L 사 회계담당자인 신 아무개 씨(61)를 구속기소했다. 신 씨는 L 사 김 아무개 대표이사와 공모해 2009년 10월부터 11월 사이 대기업 계열 건설사인 D 건설로부터 서울 영등포 1-26구역 시공사 선정을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고 5500만 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신 씨가 D 건설로부터 2억여 원의 뇌물을 더 받기로 약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앞서 4월 28일 검찰은 L 사의 김 대표이사와 함께 지난해 11월 부천 소사본 1-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시공사 선정 대가로 D 건설사로부터 3억 6000만여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L 사 김 아무개 전무(49)를 구속기소했다. 김 전무는 또 2008년 2월 파주 문산선유지구 시행사 선정 청탁과 함께 B 건설사로부터 3억 2400만여 원, 지난해 11월경 서울 상계 4구역 주택재개발사업 시공사 선정 청탁 명목으로 또 다른 D 건설로부터 8억 7000만여 원 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L 사에 해당 뇌물을 공여한 의혹을 받고 있는 업체들이 뇌물이 건네진 정황을 숨기기 위해 제3의 업체를 내세우는 치밀한 수법을 동원한 사실을 밝혀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부천 소사본 1-1구역 시공사로 선정된 D 건설은 홍보대행사를 내세워 계약을 체결하고 이곳에 홍보비로 지급한 3억 원이 L 사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뇌물을 준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서울 상계 4구역 재개발 시공사로 선정된 또 다른 D 건설사의 경우 용역업체 두 곳과 계약을 체결하고 각각 4억 원 씩, 총 8억 원의 용역비를 지급했고 해당 자금이 L 사로 모두 건너간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제3의 업체들을 내세워 뇌물이 건네진 탓에 외면상으로는 모두 합법적인 방식을 띠고 있어 검찰 수사는 아직까지 난항을 겪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해당 수사가 시작된 것은 지난해 12월경부터. 올 1월 초부터 L 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했지만 관련 정황을 잡아낸 것은 그로부터 3개월여 후인 지난 4월 25일경의 일이다. 또 검찰은 아직까지 사건의 확실한 열쇠를 쥐고 있는 김 대표를 검거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뇌물을 공여한 건설업체들로까지는 아직 수사가 확대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검찰은 뇌물 공여 혐의를 받고 있는 업체들이 모두 해당 지역의 공사를 실제로 수주했다는 점을 들어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심지어 상계 4구역 시공사로 선정됐던 D 사의 경우 이번 혐의가 드러난 공사 외에도 L 사와 관련한 재개발 시공을 세 군데나 더 맡았던 것으로 확인돼 의혹을 더욱 키우고 있다.
한편 제3의 업체를 내세워 뇌물이 흘러들어갔다는 점 때문에 해당 건설사들은 모두 L 사에 뇌물을 공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홍보대행사와 용역업체를 통해 L 사로 건네진 자금흐름에 대해 모두 “두 회사 간의 일일 뿐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
D 건설 측은 “홍보대행사를 선정해 일을 시킨 적은 있지만 L 사 김 사장에게 직접 금품을 준 적이 없다”며 “홍보대행사에서 뇌물을 준 것은 우리도 모르는 일”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B 건설 관계자는 “담당자가 검찰 조사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우리 쪽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로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상계 4구역 공사를 시공한 또 다른 D 건설은 “용역업체에 4억 씩 총 8억 원을 지급한 것은 맞다”면서 “하지만 해당 돈이 L 사에 넘어간 것은 우리 쪽에서 알지도 못하는 일이고 우리가 지시한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은 용역업체와 홍보대행사 등 뇌물이 건네진 제3의 업체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해당 자금이 뇌물이었다는 정황을 상당부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아직까지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을 해줄 수는 없다”면서도 “관련 (제3의) 업체들 수사를 통해 해당 자금이 뇌물로서 건네진 진술을 확보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런데 이번 검찰 수사가 대형 건설사들로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L 사는 도시정비업계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업체로 그간 L 사 관련 공사를 맡은 대형 건설사들만 10여 개에 달한다는 후문이다. 이에 건설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수사의 파장이 또 다른 대기업 건설사들로까지 튈 가능성이 제기되며 긴장감이 엿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건설업계 관계자는 “김 대표의 경우 업계에서 상당히 유명해 마당발로 통하는 사람이었다”며 “이전부터 건설업체들이 L 사와 관련된 공사를 맡을 때마다 선정과정에 뒷말이 상당했던 만큼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다른 건설사들로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시각이 많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기존에 재건축조합이 시공사를 직접 선정하는 과정에서 유착을 끊기 위해 도입된 도시정비업체 제도가 이처럼 폐단을 드러내면서 관련 법규의 개정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 3월 말 관련 법규가 통과돼 오는 7월부터 구청이나 SH공사에서 재개발·재건축 등 도시개발정비사업을 직접 관리하는 ‘공공관리제도’를 확대할 예정”이라며 “시공사 선정 기준과 정비업체 선정 과정에 관한 사항 등 주요 정보들이 대부분 공개되기 때문에 관련 비리들을 근절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