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회장이 지난 4월 28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천안함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
최근 현대그룹의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이 다른 채권은행들과 재무구조평가위원회를 열고 5월 말까지 현대그룹과 재무약정을 맺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알려졌다. 재무약정이 최종 결정됨에 따라 현대그룹은 재무구조 개선 압박을 받게 될 전망이다.
이번 재무약정 결정은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재무 상태 악화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룹의 주력인 현대상선은 지난해 8375억 원의 당기순손실(적자)을 기록했다. 2008년 6684억 원의 당기순이익(흑자)을 올린 것과 확연히 대비되는 수치다. 그밖에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로지엠, 현대아산 등 주요 계열사들도 지난해 나란히 적자를 기록해 재무약정 결정을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재무약정 결정에 대해 현대그룹은 강력 반발하고 나선 상태다. 현대그룹은 지난 19일 보도자료를 통해 “현대상선이 지난해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국내 해운업체 중 가장 강력한 경쟁력으로 시장에서 손실을 최소화했으며 올 1분기에는 영업이익 흑자를 달성했다”며 재무약정 대상 선정에 대한 유감을 표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상선이 현재 건강한 부채비율을 유지하고 있다”며 “외환은행의 이번 결정은 해운산업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데서 비롯된 조치”라고 덧붙였다.
현대그룹은 이번 재무약정을 주도한 외환은행과의 주거래은행 관계 청산 검토 의사까지 밝히는 등 초강수를 뒀다. 현대상선이 안정적 현금 흐름을 보이는 만큼 빠른 시간 내 외환은행에 대한 채무를 모두 변제하면서 주거래은행 변경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환은행은 현대그룹의 재무약정 결정이 채권단 공동합의 사항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현대그룹의 주거래은행 변경 검토 발표에 유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채권단 합의사항’이라지만 금융권에선 채권단 회의에서 외환은행이 재무약정 체결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 현대그룹 내부에선 “입사하자마자 제일 먼저 만드는 것이 외환은행 통장인데…” “어떻게 외환은행이 이럴 수 있느냐”라는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끌던 ‘옛 현대’ 시절부터 줄곧 외환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삼아온 만큼 이번 재무약정 조치에 대한 배신감도 커 보인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1분기 영업이익 흑자를 기록한 데 이어 4월 이익은 역대 월평균 최고치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성급하게 재무약정을 결정하는 건 너무 융통성이 없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해 적자를 냈던 계열사들이 올해 1분기에 대부분 흑자를 내고 있는데 외환은행이 이런 점을 전혀 감안해주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또 “재무약정 체결은 규정상 그 협의내용과 평가결과에 대해 비밀유지가 필요한데 평가 과정에서 주요 언론에 보도되는 등 비밀유지 의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보탰다. 이번 재무약정 결정으로부터 약 20일 전인 지난 4월 말 일부 언론을 통해 현대그룹에 대한 재무약정 검토설이 보도된 것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 현대그룹빌딩 신사옥 전경. |
현대그룹과 외환은행 갈등 양상을 지켜보는 재계와 금융권의 인사들 사이에선 이번 재무약정 결정이 현대건설 인수전에 미칠 영향이 핫 이슈다. 현대그룹의 재무약정 발표가 난 직후인 지난 19일 정책금융공사가 “현대건설 매각을 재개할 방침”이라 밝힌 까닭에서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대건설에 대한 강력한 인수의지를 드러내왔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혼이 깃든 현대건설을 인수해 범 현대가에서 제기돼온 ‘현씨 현대’ 정통성 시비를 잠재우는 동시에 그룹의 신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뜻에서였다. 게다가 현대건설은 현대그룹 경영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현대상선 지분 8.3%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현대그룹이 이번 재무약정 결정에 따라 재무구조 개선에 나서야 하는 만큼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자금 동원이 녹록지 않을 전망이다. 금융권에선 “현대건설 재매각 추진 발표가 공교롭게도 현대그룹 재무약정 결정 직후에 나왔다”며 그 배경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일각에선 외환은행과 범 현대가의 관계를 주목하기도 한다. 외환은행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옛 현대’ 시절부터 정몽구 회장의 현대·기아차,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의 현대중공업과도 주거래은행 관계를 맺어왔다. 현대차나 현대중공업은 그동안 “현대건설 인수에 관심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지만 현정은 회장이 현대건설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에 대해 범 현대가에서 불편해한다는 이야기도 줄곧 나돌아왔다. 항간에는 이번 현대건설 인수전을 앞두고 범 현대가 간의 물밑연대가 이뤄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다.
최근 정부가 천안함 사고를 북한 소행으로 공식 결론내리면서 대북 강경기류가 고조되는 가운데 대북사업 주체인 현대그룹이 재무약정 대상으로 결정된 점에 정치적 해석이 따르기도 한다. 현정은 회장과 갈등을 빚어온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가 한나라당 대표로서 여권 실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시선도 늘어가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