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열린 제57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6대 뿌리산업 경쟁력 강화전략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왼쪽 두 번째부터 윤증현 재정부 장관, 이 대통령, 유장희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강만수 경제특보). 청와대사진기자단 |
남유럽 재정위기가 터진 뒤 정부의 초기 움직임은 굼떴다. 신제윤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차관보)이 지난 8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워크숍을 찾았을 때까지도 정부는 유럽 재정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워크숍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신 차관보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G20 관계자들을 만나 보니 유럽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월요일(10일) 장이 열리기 전에 시그널을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한 뒤에야 심각성을 눈치 챘다.
일요일인 9일 임종룡 재정부 1차관 주재로 경제·금융상황점검회의가 갑작스레 열린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이후부터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남유럽 재정위기를 논외로 삼았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와 달리 정부 당국자들은 남유럽 재정위기 해결이 쉽지 않다는 시장의 사인을 15일부터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IMF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부정적 움직임이다. 언론에 보도되기는 EU와 IMF가 구제금융안에 합의했다고 나오고 있지만 IMF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국가를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EU 회원국을 돕는 구제금융안 참여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19일 열린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7500억 유로의 구제금융안 합의안이 나왔지만 IMF는 국가별 지원을 원칙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어 불확실한 상태다. 구체적인 지원 계획도 발표되지 않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7500억 유로가 유로존(유로 사용 16개국)의 전체 국내총생산(GDP) 중 8.3%나 되는 액수여서 자금 마련 성사 가능성에 대해 정부 내부에서도 의구심이 커져가고 있다. 실제 EU는 그리스를 위한 800억 유로 지원 결정에도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모하면서 유럽 재정위기를 악화시켰다.
다른 정부 고위 관계자는 “남유럽 재정위기 상황이 생각보다 오래갈 가능성이 크다. 이들 국가들은 재정적자뿐만 아니라 경상수지 적자도 심각하다. 우리나라가 빠르게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고환율과 저유가 등의 도움도 있었지만 경상수지가 큰 폭의 흑자를 이뤄냈기 때문에 가능했다”면서 “반면 남유럽 국가들은 경상수지가 적자를 기록 중인 데다 앞으로도 몇 년간 적자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재정건전성을 회복하는 데 장기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어 남유럽 재정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2008년 2372억 5200만 유로에서 2009년 2734억 700만 유로로 급증했다. 스페인도 재정적자가 같은 기간 4322억 3300만 유로에서 5596억 5000만 유로로 늘었다. 포르투갈 역시 1103억 7700만 유로에서 1259억 1000만 유로로 뛰었다. 여기에 재정적자 보전을 위해 필요한 경상수지는 적자 행진이 예상되고 있다. IMF에 따르면 그리스의 경상수지 적자는 올해 GDP대비 9.7%를 기록한 데 이어 내년에도 8.1%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5년 뒤인 2015년 역시 경상수지 적자가 GDP대비 7.3%를 기록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포르투갈은 이보다 사정이 더 나쁘다. 올해 GDP 대비 9.0%의 경상수지 적자가 예상되는 데다 내년에는 적자폭이 10.2%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포르투갈의 경상수지 적자는 2015년에도 8.9%에 이를 것으로 IMF는 분석했다. 그나마 그리스나 포르투갈에 비해 산업기반을 갖춘 스페인도 경상수지 적자가 올해부터 2015년까지 GDP대비 5%대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다.
결국 남유럽 국가가 재정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기간 긴축재정을 끌어가는 것 외에 수가 없는 셈이다. 문제는 유럽이 전 세계 GDP의 24%를 차지하고 있고, 세계 1위의 소비시장이라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의 대유럽 수출 비중이 20%가 넘어서고 있어, ‘유럽 내수 부진→중국 수출 부진과 경기침체→한국 수출 부진과 경기침체’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여기에 세계 최대 시장인 유럽을 선점하겠다던 한-EU 자유무역협정(FTA)도 위기에 처해 있다. 4월 정식서명이 물 건너간 것은 물론, 언제 정식 서명이 이뤄질지도 불확실하다. 정식 서명이 이뤄진다고 해도 긴축재정에 들어간 유럽이 매력적인 시장이 되기는 힘들다. 남유럽 재정위기를 바라보는 정부 관계자들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것도 이처럼 한국 경제에 미칠 악영향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탓이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