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실을 알게 된 피해 학생들과 총학생회는 즉시 학교 측 관계자와 면담을 시도했고, 진상규명에 나섰다. 그러나 학교로부터 뚜렷한 해답을 제시받지 못한 피해 학생 7명은 지난 4월 12일 학교법인 숙명학원을 상대로 개인당 각 3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취지의 민사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대학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숙명여대 ‘블랙리스트’ 파문 속으로 들어가 봤다.
“내가 쓴 글이 일일이 감시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끔찍해요.” “학적까지 첨부해 파일을 관리한 학교 측 의도가 의심스럽네요.”
학교 측의 이 같은 ‘학생 감시’ 행각은 우연한 기회에 발각됐다. 지난해 11월 학생회관 건물을 지나던 A 양이 학생문화복지팀이 서류정리 차 내놓은 상자 안에서 의심 가는 문건을 발견한 것이다. 서류철에는 ‘숙명인 게시판’에 학생들이 올린 글들이 1999년부터 2009년 최근까지 연도, 날짜 별로 차곡차곡 스크랩돼 있었다. 특히 촛불집회가 왕성했던 2008년 자료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몇몇 파일에는 특정 학생의 가족관계, 성적, 몸무게 등 지극히 사적인 부분까지 첨부돼 있었다.
4월 15일 기자와 만난 피해 학생 B 양은 “촛불 집회 참여 후기 글이나 반정부적 성향의 글은 무조건 스크랩한 것 같았다. 학교 정책에 반대하는 글, 학생보다 학교 의견을 중시하던 총학생회를 비판하던 글도 마찬가지였다. 내 글은 파일 하나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스크랩돼 있었다”면서 “학적이 첨부된 학생들에 대해선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파일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스크랩된 양이 많았던 내 경우 학적부가 첨부되지 않았지만, A4 한 장 분량으로 스크랩된 어떤 학생은 성적까지 첨부돼 있었다. 학교 측이 어떤 기준으로 학생들의 학적부까지 조사했는지 속시원한 해명을 듣고 싶다”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번 ‘블랙리스트’ 파문 이전에도 학교 측이 ‘숙명인 게시판’을 감시해왔다는 정황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2007년 열린 ‘총장-재학생 간담회’에 참석한 C 양은 간담회에서 느낀 아쉬웠던 부분을 ‘숙명인 게시판’에 올렸다. 글을 올린 다음 날 C 양은 학생문화복지팀에 불려갔다. ‘왜 그런 글을 올렸냐’는 것이었다. 자신의 글이 감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C 양은 이 사실을 다시 ‘숙명인 게시판’에 올렸다. 이튿날 학생문화복지팀장(현재 퇴임)은 C 양을 다시 불러내 ‘글을 당장 지우라’며 윽박질렀고, 학생처장과의 면담을 강요했다고 한다.
피해 학생들과 총학생회는 위 파일이 발견된 즉시 학교 측에 공식적인 입장표명을 요구했다. 이에 학교는 교내 교수진 4명으로 구성된 학생정보보호 태스크포스팀(TFT)을 출범시켜 진상조사에 나섰다. 지난 2월 24일 오후 3시경에는 TFT, 학교 관계자, 총학생회 관계자 간의 면담이 열렸다. 그러나 학교 측은 “숙명인 게시판의 게시글을 살펴보는 것은 학내 여론을 파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며, 학생들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하는 학생처의 고유 업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게다가 2008년 당시 이 일을 전담한 학생문화복지팀 담당 직원과 전 담당팀장은 위 면담에 불참을 통보한 채 “학교를 위한 일이었고 나름의 사정이 존재했다”는 메일만 보내왔을 뿐이다. 누구의 지시로 시작된 일이고 어떤 목적에 이용됐는지 구체적인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자, 사건이 흐지부지될 것을 염려한 학생들은 고민 끝에 소송 제기를 결정하게 됐다.
학교를 상대로 한 소 제기 과정은 생각보다 더욱 험난했다. 총학생회는 ‘블랙리스트’ 파일에 존재한 학생 90명에게 쪽지를 보내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답장이 온 것은 고작 20명의 학생에 불과했다. 게다가 대부분 “현재 장학금을 받고 있어서” “아직 졸업 전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상대로 한 싸움에 두려움을 표시했다. 결국 뜻이 모인 피해 학생 7명은 대학법률인권센터에 문을 두드렸고, 이를 통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박주민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박 변호사는 변호사 수임료도 거절한 채 변론을 자청했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15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숙명여대는 ‘공공기관의 장이 사상, 신조 등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현저히 침해할 우려가 있는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 또한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란 기본권을 간접적으로 침해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학생처장 및 교직원에게 개별적 책임을 묻는 것보다는 숙명여대가 전반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합당할 것이란 생각에 사용자 책임(민법 756조 1항)만을 물었다”고 밝혔다. 또한 형사 고소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민사 소송은 당사자끼리의 합의 및 조정이 가능하지만 형사 고소는 그렇지 않다. 일단 민사를 통해 학교의 반응을 지켜보자는 취지였다”고 답했다.
숙명여대 학생처 관계자는 15일 기자와 통화에서 “당시 그 일을 담당했던 직원 분이 퇴사했다”면서 “특별한 목적을 갖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예전부터 관례적으로 해오던 일이라 별 문제의식 없이 스크랩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다음 주 TFT가 완성한 학생정보보호 재발방지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 전에 이런 일이 터져 당황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TFT에 포함된 한 교수는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학교에서 학생들의 학적부까지 조사, 첨부한 점은 잘못됐다고 본다. 그러나 해당 정보를 부당하게 악용하거나 외부에 유출시킨 사실이 전혀 없다”면서 “부당한 목적을 위해 작성된 문서라면 대외비로 분류되어 철저하게 관리됐어야 함에도, 해당 문건에는 그런 표기가 전혀 돼있지 않았고 폐기대상으로 분류돼 창고에 방치돼 있었다. 이는 문서관리지침상 단순한 참고자료 정도로 분류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책 마련 과정에서 국내 거의 모든 대학들이 학생정보에 대한 심각한 정보 유출 사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참고할 만한 규범적 기준이 마련된 외국 대학 사례를 계속 조사할 계획이다”며 학교와 학생 간에 벌어진 소송 다툼에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