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드라마 <연애시대> |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건 여자만이 아닌가보다. 4월 들어 나에게 연락한 옛 남자는 여섯 명, 모두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라고 제안했다.
첫 번째 남자는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박훈희 씨 핸드폰이 맞나요? 너무 오랜만에 연락해서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박훈희 씨가 아니시라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번호 뒷자리를 보니, 나의 첫 남자였다. 세상에, 이렇게 정중한 문자라니!
20대에 그와 헤어진 후, 30대가 되었을 때에도 그와 만남을 계속했던 것은 그가 유머러스한 매력이 넘치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문자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이 문자를 보낸 남자가 내가 만났던 그가 맞나?’라고 의심했을 정도다. 그가 남긴 문자는 존댓말 투성이었고, 그는 내가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예의를 차리는 안부 문자를 세 번이나 보냈다. 나는 심드렁하게 답할 수밖에. 그리고 마침내 “좋은 소식은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솔직히 그가 어떤 좋은 소식을 바랐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나는 그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여전히 싱글이라는 사실, 좋은 사실 아니야?”라고 답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속내를 드러냈다. “흐, 그런가? 월요일 저녁에 밥 먹을까?”라고 제안한 것.
나는 2년 만에 연락을 하면서 가볍게 전화를 하지도 못하고, 문자를 보낸 그를 정중히 거절했다. “5월까지는 초비상사태야”라고 일 핑계를 댄 것. 그와 오랜만에 섹스를 한다 한들, 옛 추억까지 망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나보다 바쁜 여자는 오래간만이군. 시간 날 때 연락해”라고, 역시 문자를 남겼다.
두 번째 남자는 메신저로 연락을 해왔다. 대화의 내용은 자신이 두 쌍둥이의 아빠가 되었고, 인생이 재미없으며, 나와 함께했던 시간이 그립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메신저로 대화를 하면서 “응” “추카추카” “그랬구나” “고마워” 등등의 짧은 답을 보내면서 틈틈이 다른 업무 처리를 했다. 마침내 그가 “요즘도 바빠? 밥이라도 먹자”라고 소심하게 만남을 제의했을 때, “그러네. 통 시간이 안 나네”라고 가볍게 거절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남자 역시 나에게 문자를 보냈고, 나는 그를 첫 번째 남자와 비슷한 대화로 거절할 수 있었다. 네 번째 남자는 새벽 3시에 술에 잔뜩 취해서 전화해 “잠깐 볼까?”라고 물어서 그냥 끊어버렸다. 다섯 번째는 스토커처럼 매달 두세 번씩 나에게 전화를 거는 친구였다. 전화를 받지 않아도, 문자에 답을 하지 않아도, 그는 참 꾸준히 연락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오랜만에 해후한 것은 여섯 번째 남자다. 그는 나에게 전화해 마치 지난주에 헤어진 남자처럼 “주말에 데이트하자”라고 제안했다. 너무나 익숙하게 말이다. 내가 “이번 주말은 좀 어렵겠다. 급하게 처리해야 될 일이 있거든”이라고 핑계를 대자 “누나는 항상 그래요. 우리가 사귀지 못하는 이유는 누나가 너무 바쁘기 때문이에요”라고 내 자존심을 세우며 나를 졸랐다.
네 번째 남자처럼 스토커 성향이 보였다면 나는 “미안”이라는 말로 그를 거절했을 테지만, 그는 유쾌하게 제안했고,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그날 밤은 밥으로 끝나지 않았다. 집에 바래다 줄 때까지 정중했던 그는 내가 현관문을 열자 나에게 프렌치 키스를 했고, 급기야 나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옛 남자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술에 취한 내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그의 로맨틱한 키스에 마음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가끔 옛 남자에게 끌릴 때가 있다. 새벽에 술 취한 목소리로 전화하는 남자는 NO, 문자 메시지나 메신저 등 소심한 접근은 절대 NO, 그러나 가볍게 안부를 묻는 전화는 OK이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해서 격식을 차리는 남자는 NO, 어제 만난 듯이 친근하게 안부를 묻는 남자는 OK이다. 만나자마자 섹스를 암시하는 얘기를 늘어놓는 남자는 NO,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키스와 패팅 등 몸으로 얘기하는 남자는 OK이다.
처음 데이트하는 것처럼 근사한 레스토랑에 초대해 와인을 즐기는 남자는 OK이지만, 호텔로 초대해 가운을 입고 기다리는 남자는 절대 NO이다. 그곳이 5성급 호텔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왜냐고? 옛 남자와 섹스를 할 때에도 로맨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캐릭터를 되살리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 두 가지만 기억하면 옛 여자는 당신의 부름에 언제라도 응할 것이다. ‘아, 그땐 그랬지’라고 설핏 웃으면서 말이다.
박훈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