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 3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이 쓴 ‘국기태권도’ 휘호. |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격동기를 최전선에서 체험했다.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겼다. 5·16 직후 한국의 국가원수(최고회의 의장)로는 처음으로 울릉도를 찾아간 박정희 장군은 거친 풍랑으로 두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이래서 국가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야”라고 농담을 던지며 태연자약하기도 했다.
필자가 태권도 중앙도장(국기원)을 1년에 걸쳐 1972년 12월 9일에 건립하고 태권도의 국기화, 세계화의 길을 가고 있는데 다른 종목 특히 씨름과 축구계에서 “깡패놀이가 무슨 국기냐” 하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국기태권도’라는 친필 휘호를 받아 2000장의 복사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아마도 태권도를 수련한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도장에서 이 다섯 글자를 보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타 종목의 국기 논란을 잠재웠을 뿐 아니라 혼란했던 태권도계에도 활력을 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국내 태권도는 30개관으로 갈라져 있었고 해외 태권도도 전부 일본의 ‘가라테’ 간판을 내걸고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정부의 재정 지원은 없었다. 그 후 나는 스포츠로서의 조직적 체계를 갖추고 분석적 방법으로 태권도의 기초를 세우게 됐다. 역사를 찾고, 만들기도 하고 스포츠로서의 경기규칙과 헤드기어를 쓴 호구도 개발했다. 국고보조라고는 1000만 원 한 번, 2000만 원 한 번을 받아냈을 뿐이고 이렇다 할 스폰서도 없을 때다. 태권도인 전체의 소원이던 중앙도장을 맨주먹으로 건립하고 나서 사재 200만 원을 들여 재단법인 국기원을 등록하여 종주국 태권도의 세계총본산으로, 그리고 무도의 전통을 지키는 본부로서 제일 중요한 승단심사와 사범의 교육을 책임지게 했다. 정말이지 다들 많은 고생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석유파동 등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국기원은 예정대로 세워졌다. 서울 강남에 칠성사이다 공장과 산 위의 국기원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지방순시에서 돌아오는데 고속도로에서 보니 새빨간 산 위에 국기원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전국에 대대적으로 녹화사업을 추진할 때였다. “산이 새빨갛다. 나무를 심으라”고 하는 박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나무가 5000그루가 심어졌고, 양택식 서울시장이 청양에서 국기원 건물 높이의 은행나무 두 그루도 갖다 심었다.
그 은행나무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래서 현재도 국기원은 규모는 작지만 ‘푸른 국기원’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이때는 역삼동 국기원 주변에는 전기, 수도가 없어 국기원 개원 전날 특별히 전기를 끌어오고, 청와대의 이동전화를 빌려 설치하고, 우물물을 펌프로 끌어올리는 등 모든 것을 새로 마련해야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77년 후반 제3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시카고)에 갔다 와서 선수단(단장 이교윤)을 이끌고 청와대로 예방을 갔을 때였다.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이것이 박 대통령을 직접 본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1979년 박대통령 서거 시에 필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이창희 주독대사와 제4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회식을 진행하고 있다가 비보를 접했다.
▲ 위 사진은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체전 시상을 하고 있다. 아래는 미군 측과 전략회의를 하는 모습. |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대회유치가 스위스의 수도 베른(Bern)에서 있었다. 박종규 사격회장은 근신 상태로 가지 못해 대한체육회 부회장인 필자가 가서 멕시코의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 회장과 대결해 62 대 40으로 이겨 기적적으로 한국 최초의 세계대회를 유치해왔다. 비록 소련 등 공산권의 불참으로 반쪽짜리였지만 박 대통령의 지원으로 한국 최초의 올림픽종목 세계선수권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개회식을 하고, 신설 태릉사격장에서 성공리에 치러졌다. 광화문 대로에 아치가 걸리고 정부가 20억 원을 지원했다. 이때 처음으로 워커힐 근방에 선수촌을 지어 사용하고 시민에게 분양했다. 지금의 워커힐아파트가 그것이다. 당시 <런던타임스>에 근무했던 스포츠 대기자 데이비드 밀러는 자신의 저서 <올림픽혁명(Olympic Revolution)> 과 에서 세계사격대회 유치로 아시아의 지정학적 변동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체육입국’, ‘체력은 국력’을 내걸었던 한국으로서는 세계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대회를 치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바람에 곳곳에 사설 사격장이 생기고 정부의 차관 이상을 대상으로 한 사격대회가 가끔 열리기도 했다. 모두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들이다. 청와대는 운동선수를 미국 체대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박신자를 체코 세계대회 준우승 이후인 68년 초여름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체육대학에 유학을 보낸 것이다. 육영수 여사의 특별한 배려로 황선애(이상 여자농구)가 다과점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구속되었던 송요찬 장군의 장녀 송현석은 하버드 로스쿨 유학을 갈 수 있었다. 한국학술연구원도 청와대에서 300만 원을 지원해서 시작했다. 박 대통령의 청와대는 어려운 가정을 익명으로 도와준 일도 많았다.
세계사격대회의 경우 유치는 필자가 스위스로 가서 했지만, 개최는 박종규 사격연맹 회장이 맡았다. 이때 박찬현 문교부 장관이 국제성을 내걸고 필자를 대한체육회장으로 내정했는데, 차지철이 먼저 장관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박종규 사격회장이 체육회장이 됐다.
세계사격대회가 성공하니 박종규 체육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림픽 개최를 건의했다. 마침내 첫 번째 국민 체육심의회의가 남덕우 총리 주재로 열렸는데 모두가 반대했다. 최규하 총리 주재로 진행된 두 번째 회의에서는 김택수 IOC 위원이 “내 표밖에 안 나올 것”이라고 했고, 박종규 회장은 “해보고 안 되면 모두 사표 내자”고 받아쳤다. 이에 김택수 씨는 “당신이나 내시오. 나는 절대 안 내”라며 부정적으로 끝내버렸다. 모두들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총리, 김택수 IOC 위원, 서울시장, 문교부 장관, 개인위원으로 필자, 박종규 회장이 참석했다.
두 번의 회의는 이후 박 대통령 서거로 중단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정확히 따지자면 올림픽 구상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말기에 시작된 것이다. 민관식 체육회장, 박종규 사격회장 등이 앞장 서 태릉선수촌과 태릉사격장도 그때 건설되었고, 소년체전, 체육중학교, 체육고등학교, 체육대학도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 중에 이루어졌다. 그 당시는 한국경제가 너무 빈약했고 대한체육회 예산은 연간 1억 원밖에 안 되었다. 모든 경기단체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회장들이 희생과 사명감으로 열심히 자기 종목을 육성했다. 사격 박종규, 야구 김종락, 축구 장덕진, 복싱 김택수, 농구 이병희, 배구 이낙선, 빙상 김재규, 핸드볼 박창원 김종하, 레슬링 김영관, 태권도는 필자였다. 체육회 부회장은 김운용, 신도환, 신동관, 김종렬이 맡았고, 필자는 KOC 부위원장과 명예총무를 겸직하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과 최초의 단체종목 올림픽 메달(여자배구)도 박 대통령 시절인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나왔다.
▲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 조오련을 귀국장에서 축하하고 있다. |
어쩌면 당연한 소리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체육을 근대화하는 데도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제는 ‘체육입국’, ‘체력은 국력’이라고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스포츠의 사회적 영향력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마치 한국경제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체육도 복지국가 건설에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그 길목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다. 그 결과 무리수를 많이 두기도 했다. 어느 정권이나 장기화되면 정쟁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집단이 권력투쟁을 하는 것이 통례다.
하지만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많은 것을 이룩했다. 박정희 대통령 이전의 한국을 기준으로, 비슷하거나 혹은 더 나은 조건을 갖고 있던 나라들이 이후 발전은커녕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중하위권으로 밀려난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기적 같은 코리아의 발전이 박정희 대통령 개인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지만, 정치논리로 그의 공적을 폄하하는 것도 결코 옳지 않다.
전통만을 고집해서는 안 되겠지만 역사, 문화, 전통을 바탕으로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세계사를 주도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한국도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향후 보다 많은 연구평가가 필요할 것 같다. 다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렸을 적 ‘나폴레옹 전기’를 읽은 후 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필자와 같은 젊은 장교들에게 말하곤 했다. 끝으로 1963년 대통령이 된 지 얼마 안 된 박정희 장군이 쓴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글귀를 소개한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