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의 해결사로 이병규 전 현대백화점 사장이 나섰다. 이 전 사장이 지난 2002년 12월 현대백화점 사장에서 물러나 사실상 ‘현대’와의 인연을 청산한 지 1년2개월 만이다.
이 전 사장이 중재자로 나서면서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간에 벌어지고 있는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은 새 국면을 맞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동안 두 집안의 다툼을 지켜보며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못했던 현대 패밀리에서 꺼내는 비장의 카드로 드러나고 있다.
▲ 이병규 전 현대백화점 사장. 이 사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현대맨’이다. | ||
이번에 주주 제안서를 낸 범현대가는 한국프랜지, 울산화학, 현대중공업, 현대종합금속 등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갖고 있는 범현대그룹들이다.
결국 현대 패밀리는 다가오는 주총에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대신 대리인을 앞세운 화해무드 조성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업계에서는 다시 이병규 전 사장에게 쏠리고 눈길이 있다.
그가 그동안 걸어온 행보를 보면 현대그룹 안팎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 하다.
이 전 사장은 자타가 인정하는 ‘현대맨’. 그는 지난 1977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후 무려 13년 동안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비서로 있었다. 고 정 회장이 지난 92년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그는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비서실에서 근무하며 고 정 회장을 근거리에서 보좌했을 정도.
항간에는 이 전 사장을 가리켜 “고 정주영 회장이 자식들보다 더 믿는 사람”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을 정도다. 실제로 그가 지난 98년 금강개발산업(현 현대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고 정 회장의 당부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현대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부터는 ‘왕회장의 비서’라는 타이틀보다 ‘현대가의 대표적 전문경영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지난 2002년 12월 이 전 사장은 현대백화점의 상근 고문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의 이런 이력을 보면 그가 왜 이번에 현대가의 중재자로 나섰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현대가족보다 현대를 더 잘 안다는 이 전 사장이 이번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 전 사장은 <일요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현재의 심경을 전했다. 그는 “아직 중책을 맡았다는 얘기는 이르다. 주총에서 정식으로 선임된 것이 아니라서 아직 섣불리 말할 단계는 아니다”며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현대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다. 이 전 사장의 말에 따르면 현대가로부터 중재 역할을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지난 2월10일.
“지난 10일 오전 현대가의 한 곳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KCC와 현대엘리베이터를 화해시키는 데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그러나 당시 나를 중재인으로 내세우는 것이 현대가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면 맡기 힘들 것 같아 고민했다”.
이 전 사장이 주저하자 이날 오전 11시부터 현대가족들의 회의는 오후 내내 계속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전 사장이 다시 현대가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범현대가에서 다시 전화가 왔는데, 아마 오랫동안 회의가 이어진 것 같았다. 그쪽에서는 가족들간에 만장일치가 이뤄졌다고 했다. 방법은 범현대가에서 주주제안 형식으로 나를 이사로 선임해줄 것을 현대엘리베이터에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집안의 의견이 모두 일치된 것이라면 내가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고 정주영 회장에 대한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으로 범현대가 중에서 어느 쪽에서 연락을 해왔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 전 사장은 “어느 특정 집안을 언급할 수는 없다. 집안에서 ‘중재’라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며 “현대중공업, 백화점, 종합금속, 한국프랜지, 울산화학 등 모든 가족들의 만장일치임에는 분명하다”고 말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대가에서 ‘중재인 이병규’를 내세워 문제풀이에 나서기로 한 셈이다.
그러나 이 전 사장이 경영권 다툼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 밝지 않다. 그는 “KCC나 현대그룹과 아직까지 직접 접촉을 한 것은 아니지만 사태가 간단치 않다고 들었다”며 “사실(이사에 선임된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낸다는 보장은 전혀 없는 상황”이라며 답답해 했다.
실제로 그의 이런 우려는 현실화됐다. 현정은 회장측에서 범현대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브레이크를 걸고 나선 것. 현대그룹 관계자는 “범현대가가 이런 제안(이병규 전 사장을 중재자로 내세우는)을 한 의도를 알 수 없다”며 “이사로 추천된 이 전 사장이 구체적인 중재안을 내놓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수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의 말은 범현대가가 이 전 사장을 이사로 추천했다고 해도 현정은 회장측에 유리한 중재를 하지 않으면 그의 중재자 역할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될 경우 KCC와 현대그룹간의 경영권 다툼은 의결권을 가진 주주들의 표대결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자 이 전 사장은 “쌍방간의 원만한 해결이 어렵다면 나뿐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나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립적 입장에서 조율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범현대가가 이 전 사장을 중재자로 내세운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나오고 있다. 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소위 현대그룹 가신들의 입김이 다시 강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 전문경영인을 내세우는 것보다 다소 난감하더라도 집안 사람들이 직접 설득하거나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00년 정몽구-고 정몽헌 회장의 ‘왕자의 난’의 경우 양측의 ‘가신들의 난’으로까지 번진 전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