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그룹이 한나라당에 1백70억원의 채권을 더 건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진은 ‘저인망식 싹쓸이 수사’로 성과를 거둔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뒷줄 왼쪽)과 송광수 검찰총장(앞줄). | ||
한창 최병렬 대표의 진퇴문제로 내홍을 겪고 있던 2월20일 한나라당 한 고위관계자는 불쑥 ‘삼성 채권’을 입에 올렸다.
“벌써 몇 달째 이잡듯이 뒤져 왔는데 대부분 (검찰이) 파악할 만큼 파악하지 않았겠어. 이제 어느 선까지 공개하느냐다. 아무래도 삼성 채권이 걸리는 게지.”
이 인사는 최병렬 대표를 둘러싸고 당내 갈등이 폭발한 것도 ‘삼성 채권’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최 대표 용퇴론도 따지고 보면 삼성 채권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지. 대표가 관훈클럽 토론에서 이회창 후보 책임론을 제기한 뒤로 ‘용퇴론’이 거세졌잖아. 그때(관훈클럽 토론)쯤 삼성 추가 채권에 대한 수사가 한창이었잖아. 대표가 뭔가 ‘감’을 잡고 있기는 한데,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게지. 아무튼 삼성 채권이 불거진 뒤 당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한나라당에서 최병렬 대표의 대표직 사퇴를 몰고 온 배경에는 지지율 하락, 공천 갈등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당내 사정이 맞물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 일부 인사들 사이에서는 삼성 채권에 대한 검찰 수사도 무관치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 수사결과 이회창 전 후보의 측근 서정우 변호사를 통해 전달된 1백12억원의 삼성 채권 외에 추가로 1백70억원의 채권이 더 건네진 것으로 밝혀진 후 한나라당은 걷잡을 수 없는 자중지란에 빠져들었기 때문. 한나라당에 추가로 건네진 1백70억원의 삼성 채권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검찰이 여야 대선자금을 본격적으로 수사한 것은 지난해 10월. SK로부터 최돈웅 의원이 1백억원의 대선자금을 수수한 것을 밝혀낸 검찰은 5대 대기업으로 수사를 확대, LG가 1백50억원을 ‘차떼기’로 전달하고, 현대차 역시 1백억원을 ‘차떼기’로 한나라당에 전달한 사실을 밝혀냈다. 아울러 삼성이 현금 40억원을 한나라당에 제공한 것을 비롯, 이회창 전 후보의 핵심 측근 서정우 변호사를 통해 채권 1백12억원을 전달한 사실을 밝혀냈다.
검찰이 5대 기업의 불법대선자금 전달 사실을 밝혀낸 것은 모두 지난해 11월부터 12월 초순 사이의 일이다.
대기업들의 대선자금 규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던 시점에 노무현 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이 흘러나왔다.
대선자금의 대강의 규모를 파악하고 용처를 수사하던 검찰이 또다시 대기업들의 추가 대선자금 수사에 돌입한 시점은 묘하게도 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 시점과 일치한다.
검찰은 협조하지 않는 기업들에 대해 강도 높은 수사를 통해 비자금 조성 경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채권으로 전달된 삼성의 대선자금을 수사하기 위해 ‘채권’을 거래해 온 사채업자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검찰 관계자는 “사채업자 수사는 말 그대로 ‘안대희식 수사’로 이뤄졌다”며 “주요 사채업자들을 조사하는 ‘저인망식 수사’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또 “검찰에 불려와 조사를 받은 사채업자만도 줄잡아 1백 명은 될 것”이라며 “지난해 말부터 올 설까지 집중적으로 이들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고 전했다.
▲ 최병렬 대표가 ‘이회창 책임론’을 거론한 것도 삼성 채권과 관련 있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이종현 기자 | ||
이밖에도 검찰은 사채업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통해 삼성에서 한나라당에 유입된 또다른 채권의 존재를 확인했다. 1백70억원의 추가 채권이 전달됐음을 밝혀낸 것. 이후 검찰의 수사는 활기를 띠었다. 이미 구속된 한나라당 이재현 재정국장과 김영일 전 사무총장에 대한 조사를 통해 자금의 용처가 상당부분 파악됐던 것.
대선 직전 민주당과 자민련에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11명의 의원들이 받았다는 소위 ‘이적료’가 공개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즈음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 전 총재 관련설’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진원지가 사퇴압력을 받고 있던 최병렬 대표측이라는 점에서 적잖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19일자 <동아일보>는 대표 퇴진을 요구한 맹형규 남경필 의원 등을 면담한 자리에서 최병렬 대표가 ‘현재 검찰은 이 전 총재측의 불법대선자금 유용혐의를 상당부분 파악하고 있고 조만간 대형 사건이 터지게 될 것’이라며 ‘대선자금의 수렁을 벗어나기 위해선 이 전 총재측과의 결별이 불가피했다’고 말한 것으로 한 참석자의 입을 빌어 보도했다.
지난 20일 검찰은 한나라당이 대선 직전 이인제 의원측에 5억원을 제공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처럼 한나라당에 건네진 대선자금의 용처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검찰의 대선자금 용처 수사 이면에는 뭔가 특별한 수사기법이 사용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기도 했다. 삼성이 한나라당에 추가로 건넨 1백70억원을 수사하는 과정에 소위 ‘플리바게닝’(수사협조를 전제로 선처해주는 수사기법)이 있지 않았느냐는 관측이 그것.
기존의 5백억원대 불법 대선자금 수사 때와는 달리, 검찰이 추가로 1백70억원의 삼성 채권이 건네진 사실을 밝혀내고 이에 대한 용처를 추궁하자, 수사를 받던 한나라당 당직자 출신 인사들이 정치인에게 건네진 자금의 흐름을 소상히 밝히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다.
특히 대선자금 용처를 모두 진술하는 대신, 가장 예민한 문제는 공개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내건 것 아니냐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것. 그러면 한나라당 당직자들에게 ‘가장 예민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정치권과 검찰 주변에서는 이회창 전 후보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관측이 우세하다. 때마침 검찰이 추가로 건네진 1백70억원의 채권의 향배에 수사력을 집중하던 시점에, 자금을 건넨 삼성측에서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 등이 장기간 해외 출장길에 올라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돈을 건넨 삼성측에서 점점 옥죄여오는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수뇌부가 장기간 해외 출장길에 오른 것 아니냐는 것. 실제 검찰의 한 관계자는 “1백70억원의 경우 소환 조사받은 김인주 사장에게서는 전달 경로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며 “적어도 이학수 부회장을 조사해봐야 전모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고 전했다.
현재 검찰 주변에서는 삼성이 건넨 1백70억원의 향배와 관련, 대선 이후 한나라당이 삼성측에 되돌려줬다는 주장과 함께 이회창 전 총재측에서 유용했다는 의혹 등이 동시에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삼성측에서는 아직 ‘되돌려 받았다’는 확인이 없는 상태다. 물론 유용설에 시달리고 있는 이회창 전 총재측에서는 “사실무근”이라며 펄쩍뛰고 있다.
그러나 키를 쥐고 있는 검찰은 아직 1백70억원의 향배를 구체적으로 발표하고 있지 않은 상태다. 이런 상황속에 한나라당은 최병렬 대표가 ‘용퇴’ 의사를 밝혔고, 이인제 의원 등 대선 직전 한나라당으로부터 자금을 수수한 정치인들의 줄소환이 예고되고 있다.
삼성이 한나라당에 추가로 건넨 1백70억원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치권은 물론 삼성측도 당분간 좌불안석에 놓여 있게 된 셈이다. 정치권, 특히 한나라당과 삼성측은 당분간 검찰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