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현대 회장(왼쪽)이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위협에서 벗어나자마자 현대상사가 현대차 등과 거래가 끊긴다는 풍문이 돌아 그 진위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치열한 표 대결이 예상됐던 이날 주총에서 최후의 승자는 현정은 회장이었다. ‘숙질의 난’으로 불렸던 현대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일단락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 또 다른 현대 계열사인 현대종합상사는 발칵 뒤집혔다. 현대종합상사는 지난해 8월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돼 현재는 우리은행,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맡고 있다. 현대상선의 주총이 한창 열리는 상황에서, 현대상사가 발칵 뒤집힌 이유는 증권거래소로부터 때 아닌 ‘풍문에 대한 조회공시’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현대상사가 현대차 등 주요 거래처들과 향후 거래를 끊는다는 내용이 돌고 있어 진위 여부를 공시하라는 것. 이 공시 요청이 나가자마자 현대상사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현대상사의 가장 큰 거래처 중 하나가 현대차이기 때문이다.
현대상사가 지난 2003년 9월 말 총 2천1백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회사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차와의 거래 중단은 회사의 중대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사내에서 현대차와의 거래문제가 몇 차례 거론된 적은 있었지만 이 사실이 공공연하게 외부에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대상사는 곧 증권거래소에 부인 공시를 제출했다. 현대상사는 “전혀 근거 없는 얘기”라며 “향후 현대차 등 주요 거래처와 변함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이날 있었던 한 차례의 조회공시에 대해 증권가의 의구심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상사의 극구 부인에도 불구하고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최고위층 간에 뭔가 불화가 있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겠느냐는 얘기까지 돌고 있는 상황이다. 최고위층은 현정은 회장과 정몽구 회장을 지칭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증권가 관계자는 “예전부터 현대차-상사의 거래의 지속 여부에 관해 얘기가 나온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하필이면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 경영권을 방어하자마자 이 얘기가 불거져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 같은 얘기는 왜 나오게 됐을까. 당사자인 현대상사는 별 일 아니라는 표정이다. 현대상사 관계자는 “현대차가 얼마전 우리측에 사무실을 비워줄 것을 요청해 이를 확대해석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현대상사 직원 2백여 명은 현대차가 소유한 현대계동 사옥 2, 3층을 빌려 쓰고 있고, 오는 7월15일이 임대계약 만료일이다.
현대상사 관계자에 따르면 2주 전인 지난 3월 중순, 현대차는 계약 만료 후에 사무실을 비워줄 것을 통보했다. 현대차가 이를 통보한 공식적인 이유는 현대차 계열사 및 일부 부서가 계동 사옥으로 이전할 계획이어서 계동 사옥의 공간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 상사측은 결국 사무실 이전 문제가 의혹을 낳게 했다고 보고 있다. 또 현대상사 관계자는 “사무실 이전에 대해 협의가 끝난 것은 아니다. 재임대하기 위해 접촉중”이라며 현대차와의 연결고리를 강조했다.
▲ 계동사옥. | ||
우선 현대 계동 사옥으로 이전하는 현대차 부서의 업무가 상사 업무와 겹치는 것도 이유 중 하나. 현대상사는 그동안 현대자동차를 단순히 실어 나르는 수송업무뿐 아니라, 해외 영업도 도맡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지난 2002년 현대상사는 자동차의 해외 판로를 뚫기도 했다. 현대상사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현대차는 도미니카 등 중남미 시장의 판로를 뚫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상사가 이 시장 판로를 뚫어 현대 승용차와 상용차를 수출했다는 것.
그러나 이번에 계동사옥으로 옮기는 부서는 현대차의 영업본부다.
현대차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중구 태평로의 한 빌딩에 세들어 있는 국내 영업본부의 사무실을 오는 4월 초 계동으로 옮길 예정이라는 것. 물론 이들이 현재로서는 국내 영업만 맡고 있지만 상사측으로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다.
또 현대차가 주장한 ‘공간 협소’가 딱 떨어지는 이유라고 보기도 힘들다는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현재 현대차의 영업본부는 상사(2~3층 사용)와 다른 8~9층을 쓸 계획이다.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상사를 몰아낼 필요는 없는 것.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의 경영을 맡게 된 날 현대차그룹이 사실상 현대상사와 맺어온 그동안의 인연을 끊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것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비록 현정은 회장측이 KCC의 M&A공세를 극적으로 방어해내긴 했지만 현대가 내부에서는 현 회장 체제에 대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도 그 중 하나다.
현대차의 이번 조치가 향후 현대가 형제들이 현정은 회장체제에 어떤 스탠스를 취할 것인가를 예측케 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