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조영 9단(왼쪽)이 구리 9단을 16강전에서 반집 차이로 꺾었다. |
32강전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이세돌 대 구리의 일전이었다. 전야제 때 대진표 추첨에서 구리가 먼저 13번을 뽑고 뒤이어 이세돌이 숫자 ‘13’이 씌어 있는 부채를 집어내자 장내엔 일순 환호와 탄성이 엇갈렸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이며 어쩌면 조만간 천하제일검의 자리를 놓고 ‘역사적 10번기’를 벌이게 될지도 모를 두 사람이 마치 운명의 예행연습이라도 하려는 듯 불길한 숫자 13을 뽑으며 조우한 것. 갤러리의 예상은 이세돌의 우세였다. 최근 이세돌이 펄펄 날고 있는 것에 비해 구리는 얼마 전과는 달리 별로 어렵지 않은 상대에게도 걸려 넘어지면서 스스로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토로하는 상황이니까.
이튿날 아침 9시30분, 링에 오르자마자 두 사람은 탐색전도 없이 곧장 난타전을 벌였다. 검토실과 해설장에서는 “변화가 너무 어렵고 복잡해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논평을 보류할 정도였지만, 두 사람은 속기 경쟁을 하며 거침없이 미궁 속을 달렸다.
1차 전투는 흑을 든 구리의 판정승. 살벌한 싸움이었는데, 구리의 수읽기가 빛을 발했다. 이후 이세돌의 능기인 흔들기. 이세돌 응원석은 초반에 실점하긴 했지만 이세돌이 이제부터 판을 흔들어댈 테니 역전의 기회는 충분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아니었다. 이날 따라 구리는 이세돌의 가공할 흔들기에 물러섬 없이 대응하면서 불계승을 거두었다. 적잖은 충격이었다.
이창호는 이름이 좀 있는 왕시(26)를 눌렀고 최철한은 이번에 처음 보는 장웨이지에(19)를 비교적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공격형 미드필더 목진석과 안조영은 각각 나우위티엔(26)과 펑첸(25)을 제치고 골문을 흔들자 김지석이 왕시 정도 이름이 알려진 저우루이양(19)에게 불계승을 거두며 화답했다. 이래서 다섯 사람. 저조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결코 내세울 성적도 아니었다.
이세돌이 진 것도 그렇거니와 박영훈과 박정환, 기대주 ‘양박’이 탈락한 것도 아쉬웠다.
아무튼 16강전에 임하는 한국 팀은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였다. 이창호의 상대는 퉈지아시. 19세의 신예. 관록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으나 끈끈하고 두터워 만만치 않은 청년. 최철한의 상대는 스위에. 퉈지아시와 동갑내기. 이번에 나온 중국 팀 선수 중에는 웬 19세가 그리 많은지. 목진석은 콩지에, 안조영은 구리, 김지석은 박영훈을 꺾은 왕야오를 만났다. 전전 예상은 한국은 이창호와 최철한이 우세, 중국은 콩지에와 구리가 우세, 김지석-왕야오는 백중. 2 : 2 : 1의 판세였다. 3승이면 성공, 2승이면 실패라는 것이었는데, 결과는 한국의 3승이었다.
32강전에서 충격이 있었다면 16강전에서는 스타 탄생이 이었다. 16강전의 스타는, 구리를 반집으로 낚아챈 안조영이었다. 안조영-구리의 일전은 시종 피 말리는 계가 바둑이었다. 흑을 든 구리가 시원스럽게 앞서나가고 침착한 안조영이 두터운 운영으로 쫓아가는 양상이었다. 종반 입구에선 흑이 집으로 제법 여유가 있는 것 같았고, 검토실에서도 구리의 승리를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조영은 검토실이나 해설장과는 달랐다. 객관적 전력에서 열세라는 세평을 한 귀로 흘리며 세계 타이틀 홀더가 갖는 ‘이름의 프리미엄’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별명인 ‘반집의 수학자’답게 정교하게 깎고 깎아 ‘반집’을 도려내는데 성공했다. 올봄에 있었던 BC카드배에 이어 두 번 거푸 구리를 반집으로 보내고 응원석으로 들어오는 안조영을 관전객들은 “구리 잡는 안조영”이라는 환호로 맞아 주었다.
8강전은 11월에 열릴 예정. 내친김에 안조영이 멋진 홈런을 한번 날려주기를 기대한다. 다만 한 가지, 앞으로의 결과에 상관없이 최근 2~3년 사이 중국의 인해전술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전에 우리가 일본을 넘어서듯, 이제는 중국이 우리를 넘어서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은 어찌 됐든 매번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나오고 있는데, 우리는 요 몇 년 동안 김지석, 박정환 둘뿐”이라는 것. 그나마 그 둘이 이번에도 모두 중도탈락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대회장은 곤지암리조트. 풍광은 좋으나 팬들에게는 먼 거리. 세계 스타들이 바둑 두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 갔다 온 바둑팬 한 사람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대회장임을 알리는 플래카드 하나 없었다. 안내판도 작고 드물어 대회장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리조트 관리실에서 플래카드 같은 걸 걸지 못하게 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런 걸 감수하고 왜 여기까지 와서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요지였다. 정말 그게 궁금하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