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의 지원을 받아 깔끔하게 새단장한 정슈퍼(왼쪽). |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서 330㎡(100평) 규모의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최 아무개 씨. 이곳에서 10년이 넘게 장사를 해 온 그는 최근 몸무게가 5㎏ 넘게 빠져 핼쑥해진 모습이다. 최근 자신의 점포와 가까운 곳에 슈퍼슈퍼마켓(SSM)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걱정은 현실이 됐다. SSM 오픈과 동시에 최 씨의 매출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
충격에 휩싸인 최 씨는 한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단다. 그렇다고 떨어지는 매출을 넋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는 일. 이를 악물고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 가격을 낮추고 적은 금액을 구입하더라도 배달을 해주는 등 단골의 발걸음을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다행히 4개월 정도 지나자 매출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최 씨는 “다양한 노력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동안 쌓아온 친밀함이 떠난 손님들을 다시 이끌어오는 데 큰 힘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SSM의 등장으로 최 씨와 같은 영세 소매점 운영자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넓고 쾌적한 시설에 다양한 물건, 저렴한 가격 등으로 무장한 SSM에 소비자의 발걸음이 옮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나들가게’ 사업으로 영세 점포의 현대화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사업의 골자는 이렇다.
300㎡ 이하 소매 점포 운영자가 평가를 통해 나들가게 사업자로 선정되면 최대 1억 원의 자금 융자를 비롯해 간판 교체(최대 200만 원), POS(Point of Sale·판매시점관리) 시스템 구축(150만 원 상당의 기본 사양), 상품(재)배열 등 리모델링 실시, 상권분석 및 점포·상품기획 등 전반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중기청에 따르면 올 연말까지 1200억 원을 투입해 6차에 걸쳐 신규 점포를 개설, 전국에 2000여 개의 나들가게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또 2012년까지 모두 7000억여 원을 투자해 나들가게를 1만여 개까지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이에 자영업자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지원을 받아 시설이라도 깔끔하게 바꾸면 좀 낫지 않겠느냐’는 긍정적인 반응과 ‘시설을 조금 바꾼다고 해서 대규모 자본으로 무장한 SSM을 당해낼 수 있겠느냐’는 부정적인 반응이 그것. 1만 명이 넘는 소매점 상인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터넷 카페 ‘좋은슈퍼만들기운동본부’ 게시판도 나들가게와 관련한 다양한 의견들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 주영할인마트. |
반면 다른 회원(아이디 맨)은 “매장 전체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진열대 일부에 변화를 주고 포스(POS 시스템)를 설치한다고 해서 매출이 엄청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기본 동선도 없이 매장 정리만 하는 나들가게와 동선에 방향까지 정확하게 계산된 SSM의 인테리어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고 회의적인 목소리를 냈다.
싼 가격으로 승부하는 SSM과 경쟁하기 위해 마련된 공동구매시스템이 아직 가동되지 못하고 있는 것과 전문 인력이 부족한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나들가게 선정을 통보받았다는 한 소매점 운영자는 “나들가게의 성패는 물류 개선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동구매시스템을 먼저 구축해 놓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순서인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기존 취급 상품을 그대로 판매하고 있다. 껍데기만 나들가게인 셈”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지난 4월 나들가게로 선정됐다는 한 운영자 역시 “선정 통보를 받은 지 한 달 반이 넘었는데 제대로 된 컨설팅은 없고 시설 개선만 앞세우고 있다”며 답답한 심정을 털어놨다.
이에 대해 중기청 관계자는 “지난 5월 26일 신세계와 제품구매대행을 체결, 전국 나들가게 점포수가 1000여 개에 달할 무렵인 8월경 공동구매대행 규모가 갖춰질 것으로 예상한다. 또 전문 지원단은 수도권의 경우 적절한 수가 움직이고 있으나 강원도와 호남권 등 지방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꾸준한 모집과 교육을 통해 적정 인원을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 지원단을 바라보는 소매점 운영자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전문 지원단은 독립점포 지원단과 체인본부·슈퍼조합 지원단 두 부류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소상공인진흥원에서 관리하고, 후자는 해당 본부 또는 조합에서 직접 채용하여 운영하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지도요원 1명이 컨설팅을 맡는 점포가 12~15개로 너무 많다는 것.
‘소매업 관련 2년 정도의 경력자’인 전문 지원단의 자격요건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제대로 컨설팅을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보내고 있는 것. 최근 지원단의 방문이 있었다는 한 운영자는 “전문가라는 사람이 슈퍼 운영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컨설팅 수익이 점포당 300만 원이라는데 솔직히 자신의 수익만을 생각하는 게 아닌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며 불만을 쏟아내기도 했다.
중소형 프랜차이즈 편의점을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SSM의 영향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조합이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가맹점주가 개인 자격으로 신청하는 것은 괜찮다고 해 본사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진 상황”이라면서 “중소형 프랜차이즈 편의점을 지원 대상에 포함시키고, 현재 활동 중인 경력 5년 이상인 본사 슈퍼바이저들을 전문 지원단으로 활용하면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현재 전국에 대형 유통업체들이 만든 SSM은 600여 개. 반면 이번에 개설된 나들가게는 400여 개에 불과하다. 나들가게 선정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자는 4000여 명이 넘는다. 영세자영업자들이 느끼는 위기감이 크다는 얘기다. 정부에서 SSM 대응 전략으로 야심차게 내놓은 나들가게가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관계자들이 현장의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김미영 객원기자 may424@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