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걸프렌즈>의 한 장면.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점심시간이 직장인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입사 연차에 따라 차등적으로 허락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통기업에 입사한 K 씨(30)는 신입 시절이 마치 군대 같았다고 회상한다. 점심 1시간을 온전히 투자해본 기억이 없다. 책상 앞을 떠나본 적이 언제였나 싶게 딱 붙어 앉아 있어야 했던 그 시절, 입사 2주일 만에 4㎏이나 몸이 불었다.
“전화 받을 사람도 필요하고 신입 때는 거의 항상 안에서 시켜 먹었습니다. 출근해서 점심시간까지 계속 앉아 있기만 하고 늦게 퇴근해서도 바로 자거나 업무 관련 자료를 읽다보니 운동할 시간이 전혀 없더군요. 엉덩이에 본드를 붙인 듯 늘 그 자리에 있으니 살이 찔 수밖에 없죠. 그때는 사무실에 비치된 신문만 읽어도 선임한테 질타를 들었어요. 배달된 음식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 앉아 있다가 잠깐 일어나 식사하는 시간은 채 15분을 넘지 않았어요. 그땐 참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까지 눈치를 봐야 했는지 억울한 맘도 좀 있습니다.”
K 씨는 이제 3년차라 밥 정도는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아직도 신입들이 오면 같은 행동을 답습하는 것을 보자니 답답하다. 그는 “점심시간 1시간까지 눈치 준다고 해서 일 못하는 신입이 일 잘하는 건 아니다”라며 “적당한 휴식이 주어져야 능률도 오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K 씨 회사와 달리 직장생활 5년차인 C 씨(여·32)는 점심시간이 여유롭다. 화장품 업체에 근무하는 그는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고 알차게 활용한다. 공식적인 점심시간은 12시부터지만 사람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11시 40분 정도부터 엉덩이를 들썩여 45분쯤에는 일어선다. 식사는 물론이고 때로 간단한 ‘시술’을 받기도 한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조금 늦게 들어오는 거죠. 그럼 얼추 1시간 30분 정도는 자유롭게 쓸 수 있죠. 회사에서 떨어진 곳에 가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가까운 데서 먹고 카페에서 동료들과 수다를 소화제 삼기도 해요. ‘쁘띠성형’이라고, 간단한 시술을 받기도 해요. 미리 예약해두고 가면 시술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거든요. 콧대를 높이는 필러나 사각턱을 줄여주는 보톡스 주사는 정말 금방이에요. 시술 후에는 살짝 붓기가 있지만 그다지 티가 나거나 흉이 지지 않아서 바로 근무가 가능했어요. 주변 친구들도 보면 성형뿐 아니라 감기나 치과 치료 등은 퇴근 후가 아니고 대부분 점심시간에 해결해요.”
점심시간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로 회사 건물 근처 식당은 항상 만원사례다. 사람이 많다보니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외식 프랜차이즈에 근무하는 H 씨(29)는 신입시절 재미난 광경을 목격했다.
“제가 근무했던 강남 쪽은 일식당의 특성을 살려 작은 방을 여러 개로 나눈 밀실 형태였어요. 하루는 직장인 커플이 점심때 들어왔어요. 처음에 간단한 밑반찬을 들고 갔을 때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두 번째 메인 요리를 갖고 가니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더군요.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벨이 울려 들어갔는데 남자 분 지퍼가 열려 있었습니다. 순간 너무 웃겼는데 짐짓 모르는 체 하며 젓가락질을 하던 두 사람의 모습을 뒤로하고 얼른 나왔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조바심 나서 제대로나 즐겼는지 모르겠네요.”
재미있는 상황이 더 많겠지만 가끔은 즐거운 점심을 기대하고 간 식당에서 살벌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J 씨(33)는 친구로부터 씁쓸한 이야기를 들었단다.
“친구가 우리 회사 앞 건물에 있는 회사에 다녔는데 대표가 담배를 너무 싫어해서 모든 직원이 강제적으로 금연을 실시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의 선배가 점심 식사 후 회사 근처 식당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대표한테 딱 걸렸답니다. 그 사건으로 그 선배는 바로 인사 조치를 당했습니다. 담배 한 개비 피운 것치곤 굉장히 무거운 조치였어요. 친구는 그 사건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한 처사라며 분개했었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점심시간의 자유도 조심해서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창시절 점심 하면 무엇보다 도시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물가가 오르면서 직장생활 중 밥값이 차지하는 비용도 만만찮다. 때문에 요즘에는 점심때 도시락을 직접 챙겨가는 알뜰족도 상당수다. 스스로를 억척스럽다고 표현하는 A 씨(여·35)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도시락을 준비하고 때로는 아예 비용이 ‘제로’(0)일 때도 있다고 귀띔했다.
“월급도 많지 않은데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 없죠. 반찬은 최소한으로 하지만 가끔은 점심때 별식이 먹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그런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 모임이나 회식으로 외부에서 식사할 때를 노립니다. 전날 횟집에서 모임이 있던 날은 다음날 좀 어설프지만 초밥세트를 싸갈 수 있어요. 말만 잘하면 가게에서 자투리 회를 싸주거든요. 궁상맞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하루치 도시락 해결할 수 있으니 눈 딱 감고 달라고 하는 거죠. 매일 도시락 싸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N 씨(여·29)도 도시락에 관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단다.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시절 사무실 분위기가 삼삼오오 모여서 싸온 도시락을 나눠먹는 분위기였다고.
“그런데 하루는 같이 점심 먹는 사람들이 다음날 거의 대부분 약속이 있는 겁니다. 그래도 한두 사람은 남는다기에 같이 먹기로 했죠. 하지만 막상 다음날이 되니 남는 건 저 혼자였습니다. 약속이 생겼으면 미리 말을 해 주던가, 사무실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 체할 것 같더군요. 식사하고 들어오던 한 직원은 저를 ‘왕따’처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직 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해를 받을 법도 했죠. 그 뒤로는 그런 사태가 벌어질 것 같으면 도시락을 싸와도 아예 밖으로 나갑니다.”
지난해 영국의 한 신문은 경기침체로 직장인들의 점심시간도 대폭 줄었다고 보도했다. 많은 직장인들이 자신의 책상이 아닌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상사나 동료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 한 업체가 조사한 설문에서 평균 점심시간이 20분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나온 걸 보니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