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창설 기념식(오른쪽부터 김용식 위원장, 이영호 체육장관, 노태우 정무장관, 김운용 부위원장). |
김용식은 한국 외교사에 길이 남을 큰 인물이다. 김용식은 해방의 소용돌이와 대한민국의 탄생,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외국의 지원과 원조가 절실히 필요할 때 모든 조건을 갖춘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국토통일원 장관(1974년), 외무부 장관 2회(1963, 1971년), 주UN대사, 대통령외교담당특보, 주영대사, 주미대사, 대한적십자사 총재,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등을 거친 그는 참고로 <꽃신>이라는 영어소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영문학자이자 소설가 김용익의 친형이기도 하다.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출신으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수재였다. 신생 대한민국이 어려울 때 홍콩, 호놀룰루, 일본, 제네바, 영국, 프랑스 공관장을 두루 거쳤다.
김용식은 키가 크고, 풍채는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정말이지 박식했고, 영어로 훌륭한 테이블스피치까지 할 수 있는 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외교관이 수두룩할 때였다.
김용식은 5·16이 난 후에 외무부 장관, UN대사, 주미대사를 역임했고 적십자사 총재, 서울올림픽 초대 조직위원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울평화상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또 서울올림픽 기간 중에는 선수촌장으로 봉사했다. 유독 한국에서는 외교를 할 때 강력하게 하라고 주문할 때가 많다. 당연히 소리를 높이면 잘했다고 하고, 조용히 하면 ‘소극적이다’고 몰아붙이곤 한다. 김용식은 그 어느 쪽에도 끼지 않으면서도 분수를 알고 도를 지키는 외교를 한 분이었다.
그는 민주당 정부 때 외무부 사무차관으로 있다가 5·16 후에 비율빈(比律賓·당시에는 필리핀을 한자를 음차해 이렇게 불렀다) 대사로 부임했고 이후 외무장관으로 발탁됐다. 필자가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 비서관으로 있을 때는 김용식은 주 비율빈 대사였다. 1963년 필자가 주미대사관 참사관으로 있을 때 김용식은 외무장관으로 워싱턴에 협의 차 왔다. 군인 출신(김홍일, 송요찬, 최덕신)만 외무장관을 하다가 소위 커리어 직업외교관이 장관으로 부임해서 그런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 1982년 4월 5일 김용식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국기원을 방문했다. |
김용식 대사의 책임은 유엔 회원국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미국, 중화민국, 일본 그리고 16개국 참전국과 끊임없이 접촉하는 것이었다. 이때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국가 외교관들은 만날 수도 없고 말도 걸 수가 없었다.
제20차 유엔총회(1965년 11월)를 앞두고 나는 유엔총회 한국대표가 되고, 유엔참사관이 되어 김용식 대사와 직접 일을 하게 된다. 이때 유엔 대표부는 1월부터 9월 유엔총회 열릴 때까지 정보수집과 기반조성을 하고 9~12월 총회 기간 중에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할 때였다. 한국의 국력이 약했기에 누구를 만나기도 힘들었고, 또 제대로 접대하기에도 예산도 너무 없었다.
김용식 대사도 월급이 1050달러, 대표부 월간 판공비 600달러, 차량도 대사 전용차와 서류 등 운송용 소형차 한 대였고 각자 봉급에서 차량을 사서 활동할 때다. 그런 약소국가지만 김용식은 인품과 실력, 그리고 사교술로 당당히 한국을 대표했다. 하는 일이 답답하게 느낄 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진정한 전문 외교관의 길이었던 것이다.
1979년 부마사태 직후 개각구상이 있었는데 김용식 총리, 박종규 정보부장으로 가는 듯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김용식의 총리 등극은 불발로 끝났다. 박 대통령은 인품이 좋고, 한미관계와 안보외교에 줄곧 노력해온 김 대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도 김용식 대사는 안보이사회에 가서 한국문제를 연설할 때는 흥분하는 듯했다. 이때 대사 공관도 없어 동쪽에 아파트를 월 850달러에 빌려 썼는데, 큰 손님은 접대할 수가 없이 중국식당(Sun Luck East)을 많이 활용했다.
유엔총회 때는 큰돈은 아니지만 특별경비로 대표부에 2만 달러 정도가 보내져왔다. 대표부 활동과 대표단 주최 리셉션 등에 쓰는 돈이다. 돈이 도착했는데 활동비를 안 주고(그래봐야 1인당 25달러 정도) 김용식 대사가 혼자 먹는다고 외무부에 편지를 쓴 사람이 있었다. 그 정보는 곧 김 대사에게 전해졌다. 김용식 대사가 노발대발해 직원회의 때 크게 질타한 적이 있다. 분위기가 험악했다. 얼마 후 내가 동반하여 강가를 드라이브하면서 “김용식 하면 큰 이름인데, 이름이 아깝지 않느냐? 지도방법을 생각해보라”고 조언을 했다. 아랫사람의 조언은 불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용식 대사는 나중에 이름이 아깝지 않느냐는 내 말에 쇼크를 먹었다고 실토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확실히 큰 인물은 큰 인물이었다.
▲ 1966년 유엔대표부와 뉴욕총영사관 직원 부부가 함께 자리 했다. 이때는 김용식 전 장관이 주유엔 대사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
그때만 해도 서울은 국제 스포츠무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갑자기 각 국제스포츠연맹과 IOC 위원들이 몰려왔다. 필자가 친분으로 초대해서 오게 했지만 어쨌든 조직위원회도 손님을 맞이해야 하고 그러려면 ‘간판’이 필요했다. 그 나라에 대한 첫인상은 만나는 사람을 보고 정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1982년 4월 8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을 때 김용식이 줄곧 동행했다. 필자가 초청해 태권도 본산인 국기원에서 태권도시범을 보이고 태권도를 설명할 때도 김용식 위원장이 같이 있었다. 당시 필자는 참 편안함을 느꼈다. 사마란치가 필자나 태권도에 대한 ‘혹시나’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옆에 김용식 장관이 줄곧 같이 있었기에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공신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위원회는 각종 대회준비와 국제협력도 해야 했지만 TV방영권 교섭 등 계약업무와 법률문제도 산적해 있었다. 한국은 아직 국제관계가 미미해서 국제법률행위가 자체가 적었고 국제변호사도 없을 때였다. 그래서 김용식 위원장이 회의 때 미국법률회사를 추천했는데 모두가 반대해서 부결됐다. 한국에도 변호사가 많은데 왜 외국변호사를 쓰냐는 반대였다.
하지만 결국 조직위원회는 김용식 위원장의 예상대로 미국 로펌을 쓰게 됐다. TV방영권 계약서 작성 때문에 미국 NBC 방송사와 4개월간에 걸쳐 교섭할 때인데, 김&장과 KO&LEE의 변호사들을 데리고 가서 NBC가 고용한 ‘Cahill Gordon’사의 변호사와 맞붙어야 했는데 좀 벅찼다. 그래서 IOC의 권고로 로스앤젤레스의 ‘O’Melvany&Meyers’사를 쓰게 됐다. 그만큼 김용식 위원장은 국제사회를 멀리 내다본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했던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1983년 들어 어느 정도 준비가 본격화되자 올림픽 조직 위원장은 김용식에서 노태우 체육장관으로 교체되게 된다. 임무가 끝난 것이다. 그런데 올림픽이 닥쳐오니 선수촌장(Village Mayor)이 필요하게 되었다. 160개국 선수단을 수용하고 귀빈을 맞이하고 선수촌 운영요원을 지휘하는 일인데 김용식 전 위원장은 기꺼이 수락하고 봉사했다. 사마란치나 IOC 위원들과 선수촌에 가면 그가 마중하고 접대를 했다. 한마디로 올림픽의 얼굴마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사실 일국의 외무장관까지 지낸 분이 선수촌장을 하는 일은 없는데 그런 것 따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주었다. 김용식은 외무장관과 대사직을 떠났지만 이후에도 한국의 외교정책에 관해서는 계속 자문을 했다. 사무실을 63빌딩에 차려놓고 있었다.
김용식 전 장관의 업무스타일도 기억에 남는다. 아랫사람들에게 불필요한 간섭은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예컨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며 필자가 담당한 NBC 방송사와의 TV방영권 교섭이 난항을 겪고 있을 때 당시 김용식 위원장은 지금도 활약하고 있는 국무성 차관보 출신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과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 정도로 국제 외교무대에서는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아랫사람 일에 노골적인 간섭은 하지 않았다.
김용식 전 장관이 얼마나 국제적인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일화도 있다. 그 유명한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미국월드컵 유치위원장이 되어 한국을 찾아왔고, 특별히 시간을 내 김용식 위원장과 저녁식사를 하기도 했다. 이때는 키신저도 스포츠를 모를 때였고 또 강대국의 ‘힘의 외교’를 펼치던 사람이었던 까닭에 뭣도 모르고 한국을 찾아 온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FIFA 집행위원이 없어 표결권이 없을 때였는데 말이다(결국 미국은 이때 실패하고 그 다음 대회를 유치했다). 어쨌든 키신저가 찾을 만큼 김용식은 대한민국 외교의 간판얼굴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정통 외교관 김용식은 1995년 3월 31일 82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그가 떠난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지만 항상 의연하고, 밝고 흔들림 없이 초창기 대한민국 외교의 기둥으로 활약하던 모습이 생생하기만 하다.
김용운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