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2일 어윤대 KB금융 회장 내정자는 회사 경영진 앞에서 ‘국제 경쟁력 있는 KB금융을 위한 발전 전략’이란 제목의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이날 어 회장은 “국민은행 직원은 3만 명(비정규직 포함)으로 신한은행의 2배, 하나은행의 3배이며 인건비는 업계 최고 수준이지만 생산성은 최하위”라며 KB금융 주력사인 국민은행의 부실을 집중적으로 거론해 눈길을 끌었다.
어 회장이 최근 들어 카드부문 분사 필요성을 강조하는 점 역시 국민은행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대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어 회장은 신한카드나 하나SK카드처럼 국민은행에서 카드부문을 독립시켜 신속한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카드사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카드부문이 국민은행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야 자체 영업력 강화 또한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카드부문 분사가 단기적으로 국민은행 실적 악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국민은행은 지난 연말과 올 1분기 당기순이익에서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에 뒤지면서 오랫동안 리딩뱅크로 불려온 자존심을 구긴 상태다. 분기별 수백억 원을 벌어들이는 카드부문이 분사하게 되면 국민은행 실적은 다른 은행에 그만큼 더 뒤지게 된다. 결국 어 회장이 겉으로는 “카드부문 경쟁력 강화”를 외치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국민은행을 향해 ‘카드부문에 의존하지 말고 다른 은행처럼 실적을 내보라’는 일침을 놓는 것으로 해석되는 분위기다.
어 회장이 정식 취임도 하기 전에 이처럼 KB금융의 간판인 국민은행의 부진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를 ‘황영기 학습효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황영기 전 KB금융 회장(현 차바이오앤디오스텍 회장)은 지난 2008년 9월 초대 KB금융 회장에 오르면서 KB금융 내부에서조차 ‘낙하산’이란 소릴 들어야 했다.
황 전 회장 선임 반대 투쟁 선봉엔 국민은행 노동조합이 나섰지만 KB금융 주류세력으로 자리잡아온 국민은행 고위 인사들의 반감 또한 작지 않았다고 한다. 황 전 회장은 우리금융 회장 재직 당시의 투자 손실과 관련해 금융당국의 중징계를 받게 되자 KB금융 회장 취임 1년 만에 옷을 벗었다. 그때 국민은행 이사진과 노조의 황 회장에 대한 사퇴 압박이 거셌던 것으로 알려진다. 금융당국의 중징계 배경에 국민은행 전·현직 고위 인사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어 회장은 청와대와의 끈끈한 관계를 등에 업었다는 점에서 황 전 회장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경영학과 2년 후배로 대통령직속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을 최근까지 맡아왔다. 이 대통령과 사적으로는 황 전 회장보다 훨씬 가깝다는 평가다. 결국 황 전 회장과 마찬가지로 국민은행 기존 멤버들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 어윤대 신임 회장이 취임을 앞두고 국민은행의 실적을 성토하고 나서 내부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
어 회장이 정식 취임 이전부터 국민은행 실적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여가는 가운데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어 회장 취임일인 13일자로 물러나겠다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강 행장은 지난해 황 전 회장 퇴임으로 공석이 된 KB금융 회장 후보에 올랐다가 특별검사를 받는 등 금융당국과 갈등을 빚다 회장 후보직을 내놓은 바 있다.
그동안 강 행장은 “10월까지 국민은행장 임기를 채우겠다”고 밝혀왔지만 결국 어 회장 취임에 맞춰 중도 사퇴를 하게 됐다. 이와 관련해 금융권에선 정부 세력을 등에 업은 어 회장 측과 강 행장을 필두로 한 ‘국민은행파’ 간의 힘겨루기에서 일단 어 회장 측이 기선을 잡았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최근 어 회장의 KB금융행과 강 행장 사퇴를 전후로 금융권엔 KB금융 인사를 둘러싼 정치권력 개입설이 숱하게 나돌고 있다. 어 회장을 비호하는 세력과 강 행장이 손을 잡았던 세력 간의 암투가 치열했다는 내용이 일부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관련자들 모두 해당 의혹을 부인하고 있지만 KB금융 회장직을 둘러싼 외압설은 황 전 회장의 초대 회장 취임과 사퇴, 그리고 강 행장의 회장직 도전과 좌절을 거치는 동안에도 끊인 적이 없다.
금융권에선 낙하산 꼬리표를 달고 있는 어 회장에 대한 KB금융 내의 견제 시도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 몇몇 금융권 관계자들은 “황영기 전 회장은 재무 관료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밀려났다”며 “어윤대 회장의 롱런 여부가 관료 세력과의 관계 설정에서 갈릴 것”이라 보기도 한다. 아울러 강 행장을 위시한 국민은행 전·현직 임원들이 어 회장 견제를 위해 외부 세력과 손을 잡으려 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한편 어 회장은 지난 8일 한 포럼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차기 국민은행장은 내부인사 중에서, 취임 후 10일 이내에 선임하겠다”고 밝혔다. 강정원 행장의 조기 사퇴와 외압 논란 등으로 어수선한 조직을 빨리 장악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어 회장이 과연 여러 논란을 잠재우고 ‘KB금융호’에 안착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