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12월 정주영 대통령 후보의 여의도 유세 장면. | ||
문화실의 역할은 이 조직의 전신이랄 수 있는 그룹통합홍보실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통합홍보실은 80년대 중반 무렵 현대건설 홍보팀을 축으로 만들어진 홍보조직이었다. 문화실은 이 통합홍보실을 근간으로 새롭게 진용을 짜 구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실의 출범은 장차 현대그룹에 큰 변화의 바람이 몰려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정체가 드러났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조직은 92년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사전작업의 하나였던 것이다.
당시 기업인으로는 최정상에 올랐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정 회장은 87년 동생 정세영 회장에게 그룹회장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은 90년대 들어 새로운 야망을 불태웠다.
대통령이 될 꿈을 꾼 것이다. 그는 92년 12월에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출마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정 명예회장의 나이는 75세(1915년 11월생)였다.
정 명예회장이 왜 대선 출마의 뜻을 가졌는지는 정확치 않다. 이명박 서울시장(당시 현대건설 회장)은 “정 명예회장은 국가발전을 위해 마지막으로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며 80년대 말부터 대통령 선거 출마의 뜻을 가졌던 것으로 안다”고 술회했다.
물론 정 명예회장의 이같은 생각은 그룹 핵심 인사들만 눈치를 채고 있었다. 정 명예회장의 정계 진출에 대해 일부 핵심 경영인들은 반대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이명박 서울시장도 반대론자 중 하나였다. 이로 인해 이 시장은 정 명예회장과 다소 불편해졌고, 결국 이 시장은 정 명예회장이 대통령에 출마하기 직전 그룹을 떠나 정계에 진출하게 됐다.
어쨌든 문화실은 이런 배경에서 출범했다. 문화실의 초대 실장은 이병규 현 문화일보 사장(당시 정주영 명예회장 비서실장)이 맡았다. 그는 비서실장 겸 문화실장을 겸직하는 그야말로 그룹 내에서는 실세 중 실세였다.
이병규 사장이 문화실장을 맡은 대목 역시 향후 정주영 명예회장의 행보를 예측케 하는 부분이었다. 사실 이 사장은 홍보업무에 전혀 경험이 없었다.
정 명예회장이 그룹통합홍보실을 문화실로 이름을 바꾼 것은 당시 문화부 장관을 맡고 있던 이어령 장관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평소 정 회장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이 전 장관은 기업문화에 대한 홍보 필요성을 정 회장에게 역설했다. 정 회장도 기업문화의 대내외 홍보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려 이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런 배경도 있었지만 당시 문화실의 탄생 배경에는 앞서 지적한 92년 대선준비 외에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현대그룹의 경영권 변화였다.
현대그룹의 경영권 변화는 이보다 앞선 87년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87년 1월 정 명예회장은 자신의 나이가 70대에 들자 그룹회장직을 동생인 정세영 회장(당시 현대자동차 회장)에게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물론 그 당시에도 정 회장의 모습은 정정했다. 그러나 기력이 예전과 달라지고 있음은 정 회장과 가족들이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정 명예회장은 직감하고 있었다.
정 명예회장이 그룹회장에서 물러나면서 그룹 안팎에서는 크고작은 사건이 잇따랐다. 잠자고 있던 노조문제가 불거져 나왔고, 8남매에 이르는 정 명예회장의 2세들도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현대그룹 계동 사옥과 이병규 초대 문화실장. | ||
일례로 당시 정세영 회장이 이끌던 현대자동차와 정몽구 회장이 이끌던 현대자동차써비스-정공 등이 자동차판매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와는 별도로 갤로퍼라는 차를 만들어 독자판매에 나서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때문에 이를 우려하던 정 명예회장이나 그룹 내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그룹 전체를 통할하는 연결조직이 필요했다.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던 종합기획실이 여전히 그룹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지만, 그 조직 내에서도 균열의 조짐은 없지 않았다.
그런 차원에서 문화실은 매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룹의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현대그룹이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그룹 전체를 모이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어쨌든 문화실이 탄생하면서 자연스럽게 ‘현대그룹 홍보인맥’이 형성됐다. 현대그룹 홍보 인맥의 중요성은 문화실 출범 이후 10여년 동안 구축된 홍보인맥이 지금까지도 한국 재계 홍보인맥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실 출범에 앞서 그룹통합홍보실을 맡았던 사람은 박규직 전 현대엘리베이터 사장이었다. 당시 부사장 직급으로 통합홍보실장을 맡은 박 사장은 고려대 출신으로, ROTC 1기였다.
박 사장은 비교적 대인관계가 원만했지만, 일부에서는 그가 정몽헌 계열이라는 시각도 던졌다. 실제 그는 통합홍보실장을 물러난 후 정몽헌 전 회장 계열인 현대엘리베이터 사장을 지내다가 90년대 후반 현대그룹을 떠났다.
그후 문화실이 정식 출범하면서 이병규 사장이 초대 실장을 맡게 됐다. 당시 문화실 홍보인맥은 크게 세 줄기였다. 건설 출신, 자동차 출신, 그리고 정주영 회장의 측근 인맥 등이었다. 물론 이처럼 다양한 인물들이 모이다보니 홍보나 개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당시 문화실의 핵심 홍보맨 계보를 보면 이병규 실장(당시 이사)을 정점으로, 이영일 현 KCC고문, 홍영수 전 현대백화점 이사(당시 부장), 박충규 전 과장(작고), 김봉경 현 기아자동차 상무(당시 과장), 박일권 현 현대건설 상무, 손광영 현 현대건설 상무, 김상욱 현 현대카드 전무(당시 과장), 김문현 현 현대중공업 상무(당시 과장), 이광석 현 현대산업개발 상무(당시 과장)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문화실 멤버는 아니지만 박찬종 당시 현대전자 이사, 이용훈 현 현대자동차 부사장, 최한영 현 현대자동차 사장, 김익환 기아자동차 부사장, 권오갑 현 현대중공업 전무, 이용복 현 현대자동차 부장 등도 현대건설-전자-자동차-중공업 등 계열사 홍보팀에서 맹활약했다.
문화실의 활약상이 가장 돋보인 것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통령 선거 출마의사를 밝힌 92년 초부터였다. 선거를 지원하는 핵심 역할을 문화실이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문화실의 이 역할은 나중에 정 명예회장이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조직원들이 시련을 겪게 되는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