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청바지 돌려입기> |
최근 뉴욕 여행책을 편집하고 있는 나는 문득 뉴욕에서 후배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게 “언니는 옷이 거의 다 귀여운 스타일이네. 뉴욕에서는 소녀스러운 패션 스타일은 안 먹혀. 섹시한 스타일이 먹히지”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녀 말이 맞았다. 나는 원피스나 정장으로 드레스업하기보다는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차림을 주로 입고, 블라우스나 셔츠보다는 티셔츠를, 몸에 타이트하게 붙는 펜슬 스커트보다는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이런 내 옷가방을 보았으니 후배 입에서 “스타일 좀 바꿔봐”라는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예쁜 것만으로는 남자를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후배의 조언을 한귀로 흘려들었다. 서울의 내 옷장에는 일명 ‘승부복’이라 부르는, 나만의 ‘미팅용 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용 ‘승부복’은 입었다 하면 백발백중 애프터가 들어왔다. 비비드한 오렌지 컬러의 니트였는데, 등이 깊게 패인 이 니트 스웨터는 성글게 짜인 니트가 망사처럼 안이 훤히 보여서 남자의 호기심을 꽤나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망사 스웨터 안에 레이어드용으로 입는 티셔츠(패션 브랜드에서 세트로 제작되었다)가 살색이라는 점. 마치 ‘어? 티셔츠 안에 저거, 살이야?’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살색으로 나온 것처럼, 피부톤과 흡사한 컬러였다. 이토록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승부복’을 입고 나가면, 지나가던 남자들도 내 가슴 부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니 소개팅에 나온 남자는 어떻겠나. 옷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벗은 것 같기도 한 나를 보면서, 대부분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초봄에는 “춥지 않나요?”라고 말을 건네는 남자도 있으니, 나는 “왜요? 안아주시게요?”라고 농담으로 맞받아치며 분위기를 이끌곤 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대놓고 섹시한 드레스, 가슴이 확 파인 원피스를 입었다면? 남자는 “아, 좀 부담스러워”라고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깊이 파인 원피스만이 섹시한 옷은 아니다. 요즘 여자들은 가슴을 연상시키는 옷, 예컨대 나처럼 망사 소재의 옷을 입는다거나, 아니면 몸에 타이트하게 붙는 티셔츠가 섹시함을 어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이나 일본의 여성복이 뉴욕의 여성복보다 귀여운 스타일인 것만은 사실이다. 동양 남자들이 서양 남자들보다 여자의 ‘애교’에 점수를 후하게 주니까. 성적인 매력으로 어필하는 팜므파탈에 혹하면서도 내 여자만큼은 다소곳한 여자, 부끄러움을 타는 여자, 상냥한 여자이기를 바라는 남자가 비교적 많지 않나. 섹스할 때도 서양 남자들은 여자가 제대로 표현하고 요구하고, 애무부터 삽입, 피스톤, 사정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여자를 좋아하는 반면, 동양 남자들은 대체로 남자의 리드를 잘 받아주는 여자를 더 좋아한다.
상대의 성욕을 자극하려면 그에 맞는 적당한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하다. 여자가 바라는 것은 스타일리시한 패션이 아닐 수도 있다. 여자가 성적으로 흥분하려면 트렌디한 패션 스타일보다는 섹시한 스타일이 효과적이니까. 면 팬츠에 폴로 셔츠를 입은 모범생 타입은 ‘멋진 남자’로 보일 수는 있지만, ‘섹시한 남자’로 보이기는 어렵다. 스키니진에 박스 티셔츠를 입은 스타일리시한 남자도 매력적으로는 보일 수는 있지만, 성욕을 자극하는 데 그리 효과적이진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가 탄탄한 갑바와 튼실한 허벅지가 슬쩍 엿보이는, 그래서 남자의 알몸을 연상시키는 티셔츠와 데님 팬츠 차림의 남자에 흥분하는 게 아닐까.
물론 대화에서도 섹시함이 묻어나야 한다. 스킨십 얘기가 아니다. 대화를 리드하느라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게 되는 때가 있지 않나? 아무리 스타일이 멋져도 ‘나홀로 스타일리시’한 남자는 여자를 자극하지 못한다. 때로 어색한 상황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만드는 법. 그보다는 얘기 도중 잠깐 말을 멈추고 어색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면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는 왠지 여자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타이밍은 여자의 말이 끝난 직후가 좋다.
섹스도 마찬가지. 혼자서 테크니컬한 스킬을 구사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덜 매력적이다. 닿을 듯 말듯 여자를 안달나게 하고, 간혹 여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섹시한 남자가 훨씬 매력적이다. 매너가 좋은 멋진 남자는 여자의 로망이지만, 섹시한 남자는 여자에게 꼭 경험하고 싶은 판타지가 아닐까.
박훈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