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육상경기연맹 네비올로 회장 부부와 임진출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필자 부부. |
네비올로는 1923년 이탈리아 토리노(Torino·2006동계올림픽 개최지)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는 주폭뛰기 선수였고, 법률과 정치학을 공부했는데 1961년에 FISU 즉, 국제대학스포츠연맹 회장이 되어 1999년에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대학생 운동대회(U대회)를 올림픽 규모의 대제전으로 발전시키고 FISU의 재정도 브뤼셀(Bruxelles) 본부 건물 마련을 비롯해 탄탄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각국이 국위선양을 위한 이벤트를 유치하는 데 있어 올림픽이 안 되면, 아시안게임 같은 대륙경기나, U대회 유치로 가는 것이 정석이 될 정도로 U대회가 커진 것이다.
우리나라도 1997년 무주동계유니버시아드,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를 이미 성공적으로 치렀고, 2015년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를 준비하고 있다. 네비올로는 FISU에 이어 1972년 세계육상연맹 이사가 되고 1981년에는 세계육상연맹 회장, 1983년에는 하계올림픽 회장에 뽑혔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IOC 총회에서 IOC 위원이 됐다. 그는 노년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다 76세이던 1999년 암으로 고생한 끝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공백은 FISU의 경우 미국인 킬리안(Killian) 부회장, IAAF는 세네갈인 디악(Diack)이 각각 채웠다. 워낙에 네비올로가 행정, 경기, 재정 면에 튼튼하게 자리를 잡아 놓았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도 네비올로가 키운 단체는 모두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모두들 네비올로 덕에 지금도 잘 먹고 산다고 할 수 있다. 네비올로의 경우를 놓고 보면, 세상사는 고생하면서 노력하여 이루어 놓은 사람, 그것을 누리는 사람이 다른 것 같다.
사마란치는 가끔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를 지원했던 네비올로가 죽자 “이 시대의 위대한 스포츠지도자”였다고 높이 칭송했다. 반면 그의 독선적이고 안하무인격인 저돌적인 행동은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일부 서방언론은 그를 ‘마피아’로 비유했다.
사마란치는 GAISF의 켈러 회장과 IOC와 GAISF 간에 누가 세계 스포츠를 주도하느냐를 놓고 격돌했고, 결국 GAISF를 거세했는데 이 과정에서 네비올로가 ASOIF 회장으로서 최선봉에 선 것은 아주 유명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네비올로를 처음 만난 것은 1976, 1977년 GAISF 총회에서였다. 1975년 몬트리올 총회에서 세계태권도연맹이 GAISF에 가입했기 때문에 76년 바르셀로나, 77년 몬테카를로 총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세계태권도연맹의 취약성을 보강하기 위해 영입한 부총재 중 한 사람이 로랜드 데마코(Roland Demarco) 한미재단이사장인데 이 사람이 이탈리아계였고, 이를 통해 네비올로하고 친해지게 됐다.
이후 1980년에 네덜란드의 아드리안 파울린(Adrian Pauleen)이 세계육상연맹 집행위원회를 프라자호텔에서 개최했고, 네비올로 내외가 집행위원으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고 해 필자가 그들을 마리오 크레마(Mario Crema) 이탈리아 대사와 함께 조선호텔로 초청해 만찬도 베풀고 국기원에서 태권도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 후 네비올로는 태권도를 ‘따깨원도’라고 늘 불렀다. 발음이 어려워서 그랬겠지만 국기원에서 대환영을 받은 까닭에 태권도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졌던 것이다.
서울이 1981년 9월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개최권을 획득한 후 본격적인 올림픽 준비를 시작하면서 국제육상연맹 회장에 선출된 네비올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해관계에 놓이게 됐다.
문제가 생긴 것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각 종목 국제연맹과 협의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조상호 사무총장의 이름으로 올림픽 경기 스케줄을 발표한 것부터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육상은 네비올로가 세계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IAAF의 동의 없이는 경기를 할 수도 없게 되어 있는 것이 당시 룰이었다. 또 경기 스케줄이 없이는 TV방영권 교섭을 할 수 없었다. 우선 네비올로와 육상 스케줄을 협의해야 하는데 그 임무가 필자에게 떨어졌다. 개인적으로 네비올로를 안다고 해도 외교는 실리와 확증을 가지고 하는 것이지 상상이나 이념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안면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 97무주·전주 U대회에 참석한 IOC 위원들. 왼쪽부터 킬리안, 네비올로, 필자, 기싱크. |
1983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로마, 헬싱키 등에서 개최되었는데 네비올로는 헬싱키에서 자기 방 크기가 사마란치 것과 같은지 크기를 재기도 하고 사마란치 차가 벤츠면 자기 것은 롤스로이스로 바꾸게 한 일화도 있다. 그만큼 괴짜이면서 성질이 까다로웠던 것이다. 한번은 서울에서 사마란치는 신라호텔 스위트에 묵었는데 같은 사이즈의 방이 없어 네비올로는 힐튼호텔 20층 스위트에 머물게 한 뒤 다른 말이 안 나오도록 필자가 아예 붙어 다닌 적이 있다.
결국 1985년 아테네 IAAF 집행위원회까지 네비올로를 쫓아다니면서 설득한 끝에 간신히 12시에서 14시 사이에 육상 100m, 200m의 준결승, 결승을 넣기로 합의하였고, 그 대가로 세계육상연맹에 2000만 달러의 스폰서계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또 서울시간에 서머타임(Summer Time)을 적용해서 실제로 한 시간씩 당기는 효과를 보도록 했다. 이때 육상 100m 결승 광고는 30초에 30만 달러인 반면 어떤 종목은 아예 광고가 안 붙기도 했다. 그 후에도 육상, 수영같은 주요 종목 총회 등에 준비 보고 차 돌아다녔는데 육상이 제일 요구 조건이 많아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육상 총회에서는 참석 인원 300명에게 오찬을 베풀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조직위는 IAAF에 2000만 달러를 후원했고 네비올로는 이 돈으로 모나코에 육상재단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이어 오고 있다. 건물은 레이니에 대공이 무료로 임대해준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역사가 2011대구육상선수권대회 유치에도 도움이 된 것이다. 지금의 대구시장 김범일 씨가 88올림픽 당시 마케팅담당관이었고, 대구육상대회 사무총장인 문동후 씨는 당시 경기기획관이었다.
서울올림픽에서 육상은 역시 꽃이었고 벤 존슨(캐나다)의 약물복용이 큰 문제가 됐다. 캐나다의 파운드(Pound) 집행위원이 덮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폭로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네비올로와는 관계가 없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는 황영조가 1위로 골인할 때 필자는 네비올로와 함께 있었고 그때부터 세계육상대회 개최와 관련된 대화를 나눴지만 아직 한국 육상이 너무 취약해 월드컵 육상으로 대신했다. 몇 번 스폰서를 잡으려고 사무국장 파술로(FASULO)를 서울에 보냈는데 한국이 그때는 그럴 형편이 아니라 성사되지 않았다.
1997년 무주 유니버시아드 유치는 1993년 미국 버팔로에서 있었던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기간 중에 결정되었는데 선거는 요식행위고 네비올로가 사전 막후 결정을 해놓고 있었다. 이때는 무주로 결정해 놓고 발언과 질문, 만찬 등 각본대로 하고 무주가 개최권을 가져왔다. 이때부터 네비올로는 공탁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동계 250만 달러, 하계 500만 달러였다(지금은 하계 공탁금이 무려 2000만 유로). 미국 버팔로 유니버시아드는 한국의 전국체전 수준이었고 귀빈도 없었다. 하기야 TV방송사도 관심이 없고 스폰서도 없으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001년 베이징대회, 2003년 대구대회서부터 오늘날의 대학생 축전으로 세계적 규모로 성장했다.
지금 브뤼셀에 있는 FISU 건물은 이러한 공탁금과 중국의 기증으로 이루어졌다. 대구유니버시아드 유치 때는 네비올로는 타계하고 지금의 킬리안(미국) 회장이 대행할 때였다. 참고로 2015 광주U대회 유치 때는 킬리안이 회장이었다.
사마란치가 호의를 베풀어 육상연맹 집행위원과 IOC 집행위원 간의 연석회의가 세계육상대회 기간 중 열리게 됐다. 단결을 강조한 사마란치에게 축구, 육상이 올림픽에서 나가면 그야말로 큰 타격이었다. 육상-IOC 연속회의에서 네비올로는 대등하게, 혹은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민망할 정도로 사마란치를 공격하고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육상연맹 회장, ASOIF 회장, GAISF 집행위원이 된 네비올로는 그 다음에는 IOC 위원 자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탈라아에 이미 IOC 위원이 둘이나 있어 될 수가 없었다. 사마란치가 IOC 집행부와 총회에 단결을 명목으로 ‘국제연맹 회장 당연직’으로 하자고 통사정을 했다. 그래서 네비올로는 겨우 1992년에 IOC 위원이 되었다.
1999년 스페인의 세비야(Sevilla) 육상대회와 IOC 회의 때 이미 건강이 나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지막 본 것이 그곳 호텔 풀(Pool)에서 물 속을 걸어다니는 장면이었다. 죽기 얼마 전에 이탈리아 정부가 저택을 하나 주어서 차려놓고, 초대가 있어 가 보았다.
네비올로는 늘 돈을 직접 만지지 말라고 조언을 했다. 뭐 우리나라에서는 직접 결제 안하고 안 만져도 ‘지시에 의해서’라고 증언만 받아내면 회계법 위반이라고 유죄를 내리지만 말이다.
네비올로는 괴팍하고 저돌적인 괴인이기는 하지만 근본 인간성은 따뜻하고 무엇보다 스포츠를 위해, 육상을 위해 정신없이 달리다가 간 사람이다. 또 스포츠의 발전을 위해서는 돈이 꼭 필요하다는 사마란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육상과 대학스포츠에 관한 한 그 역사에서 네비올로의 이름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