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2세들은 대개 끼리끼리 모인다. 그 이유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코드’ 때문이다. 그래서 재벌 2세들의 사교범위는 생각보다는 넓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평소 가깝게 지내는 사람과는 속을 내보일 만큼 친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아예 통성명조차 않고 지낸다. 술을 마셔도 아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행을 가도 친한 사람들과 즐긴다.
재벌 2세들 중에 가장 교류가 많은 사람을 꼽으라면 L씨, C씨, J씨를 꼽을 수 있다. 그룹 규모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들은 학교 선후배이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유학을 하는 등 공통점이 많다. 그들은 규모는 작지만 사업도 함께 벌일 정도로 친했다.
이들의 사고방식이나 스타일은 조금씩 달랐다.
가장 연장자인 L씨는 어떤 일에서든 주도하는 스타일이었고, C씨는 ‘왕자기’가 다분했다. 반면 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어린 J씨는 좀 소심한 편이었다. 서로 다른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는 부분은 약간 의아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문제의 사건이 터진 것은 2000년 초반 무렵이었다.
L씨의 주도로 이들 세 사람은 저녁 무렵 강남에 있는 P사우나에서 만났다. 사우나를 한 뒤 평소 잘 가던 술집에서 오랜만에 가무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L씨가 이날 두 사람을 불러낸 것은 때마침 C씨와 J씨가 해외 출장을 끝내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해외 출장에 따른 피곤도 풀고 회포도 풀자는 뜻이었다.
이날 사우나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J씨였고, 5분쯤 뒤에 C씨가 들어왔다.
그런데 초저녁이어선지 사우나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이들이 P사우나를 즐겨찾는 이유도 초저녁 무렵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그 즈음 L씨는 도로가 막혀 이들보다 한 시간쯤 늦게 도착했다.
일은 그 사이에 터졌다. 오랜만에 만난 C씨와 J씨는 사우나탕에서 큰 소리로 떠들며 얘기를 나누었다. 심지어 욕탕에 들어가 물을 튀기는 장난까지 쳤다.
회사 내에서는 짐짓 근엄한 자세를 지켜야 하는 그들이지만 이날따라 천진난만한 치기가 발동했다. 그런 치기어린 장난을 치고나면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남들의 이목을 의식해야 하는 재벌 2세들의 애환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사우나탕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키는 180m가 넘는 데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가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등판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용꼬리, 뱀꼬리 문신을 새기고 있어 얼핏 보아도 이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두 명의 덩치가 사우나탕으로 들어온 사실을 모른 채 C씨와 J씨는 물을 튀기는 장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교롭게도 J씨가 튀긴 물이 덩치 두 명 중 한 명의 얼굴에 끼얹어지고 말았다.
사우나탕에 들어서면서부터 두 사람이 물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며 거북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덩치들은 끝내 자신들의 얼굴에 물이 튀자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XX들!”
갑작스런 호통소리에 C씨와 J씨는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는 연신 사과를 했다. 그러나 화가 치밀어 오른 덩치들은 물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연신 C씨와 J씨의 머리에 끼얹었다. 심지어 물을 튀긴 J씨의 머리채를 잡고 탕속에 집어넣어 몇 순배 물까지 들이키게 했다.
덩치들은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연장자인 듯한 사람이 C씨와 J씨의 귀를 잡아채고는 질질 끌어 사우나실의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무릎 꿇고 손들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덩치는 C씨와 J씨에게 무릎을 꿇린 뒤 두 손을 들라고 명령했다.
이에 C씨가 반발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가만 두지 않겠다.”
C씨가 반항하자 덩치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어라, 너 가만 보니까 요즘 신문에 자주 나오는 재벌 2세인 XXX지? 잘 걸렸다. 니들처럼 노니까 경제가 X판이지.”
반발하던 C씨는 오히려 덩치로부터 따귀를 두 대나 맞고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덩치들이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선생님에게 벌을 받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럴 즈음 L씨가 탕 안으로 들어섰다. C씨와 J씨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L씨는 “무슨 일이냐”며 달려왔다.
하지만 L씨를 본 덩치들은 “네가 친구냐? 너도 이리와서 손들어!”
‘아닌 밤에 홍두깨’격으로 L씨마저 벌을 받아야 했다. 세 사람은 그 후 10여분 동안 덩치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했다.
이런 상황은 사우나실로 여러 명의 손님이 들어서면서 끝이 났다. 손님들이 들어오자 덩치들은 세 사람을 내버려둔 채 슬금슬금 사우나를 빠져나가 버렸다.
창피를 당한 세 사람은 이날 밤 평소 단골로 가던 술집에 모여 분노로 몸을 떨었다. 양주 한두 병이면 취하던 세 사람은 이날 밤 무려 6병을 비웠다.
세 사람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렇다고 어디다 자신들이 당한 내용을 얘기할 수도 없어 한동안 이들은 속앓이만 했다.
복수에 앞장선 사람은 J씨였다. ‘이에는 이’. J씨는 창피하기 그지 없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K씨를 불러 P사우나에서 벌어진 얘기를 전했다.
K씨는 J씨 회사의 하청업체로 건설시공사 간부였다. J씨가 K씨에게 그같은 고백을 한 것은 건설시공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발이 넓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J씨로부터 얘기를 들은 K씨는 “바로 해결하겠다”며 호언장담했다. K씨는 속으로 ‘이번 일만 잘 해결해주면 앞으로 J씨 회사 일을 따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K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그쪽 세계의 사람들을 총동원해 P사우나에서 일을 벌인 문제의 사람들을 찾아냈다. 나중에 전해진 바에 의하면 그들은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맞고 세 사람을 찾아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고 한다.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