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박전을 벌인 주인공은 S그룹 계열사인 D사의 부회장 L씨와 대기업인 H사의 S회장이었다. L부회장은 이제 마흔을 갓 넘긴 젊은 경영인이었고, S회장은 예순을 코앞에 둔 저명한 경영인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났던 그 자리에는 당시 현직 각료였던 L씨도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이 음식점에는 업계에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들도 다수 참석해 있었다. 업계 대표들과 주무부처 장관 및 공무원들이 신년 교례회를 갖고 있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있었던 대표적인 인사로는 L장관을 비롯해 S전자 Y부회장, 또다른 S사 C부회장, 그리고 사건의 주인공인 D사 L부회장과 H사의 S회장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이날 모임은 신년교례회인 데다, 저녁 식사를 겸하는 자리여서 초반에 참석 인사들 간에 폭탄주가 돌 정도로 분위기 자체가 화기애애했다. 게다가 장관까지 참석해 있었으니 이 같은 소동은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술이 몇 순배 돌아갔을 때 L부회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처음부터 얼굴빛이 그리 좋지 않던 L부회장은 평소 술을 잘하는 편이긴 했지만 처음부터 거푸 술을 들이켜 주변에서 만류할 정도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L부회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봉투 개봉용으로 쓰는 작은 칼을 쥐고 때마침 맞은 편에 앉아 있던 S회장을 겨냥하며 “야, ×××, 너는 죽어야 해”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갑작스런 소란에 참석자들은 어리둥절한 모습들이었다. 일부에서는 “아니, 저런 어린 ×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어쨌든 흥분한 L부회장은 S회장에게 달려가 몸싸움을 벌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S회장은 당황했다. 그러자 S회장을 수행하며 참석했던 H사의 임원들이 “이런 버릇 없는 ×이…”하면서 L부회장의 멱살을 잡아챘다. 싸움은 순식간에 커졌다. 음식점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L부회장은 말리는 사람들 틈으로 S회장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S회장이 저항을 했지만 젊은 L부회장의 발길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들의 싸움을 뜯어 말리던 국장급 공무원들도 상처를 입었을 정도로 이들의 싸움은 격렬했다. L부회장과 H사 임원, 그리고 공무원들이 뒤엉킨 이 해프닝은 10여분간 계속됐다. 사람들에 떠밀려 자리를 나온 L부회장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육두문자를 써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야말로 눈뜨고는 볼 수 없었던 부끄러운 장면들이 한동안 벌어졌던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소동으로 이날 저녁 모임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어쨌든 이날 저녁 사건은 참석자들간에 쉬쉬하며 불문에 부쳐졌다. 나중에 L부회장의 부친인 L회장이 S회장을 찾아가 사과하는 등 후유증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진은 그후에도 계속됐다. 그 자리에 참석한 L장관을 비롯한 인사들 모두 이 문제로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문제는 사건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이 사건이 벌어진 배경이 더욱 관심을 모았다.
사건의 발단은 S회장이 있는 H사가 L부회장이 이끌던 D사를 인수하려다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며 포기한데서 비롯됐다. 당초 H사는 D사의 주식 3천여만주(1천2백19억여원어치)를 H사의 전환사채 2천4백38만여주(1천2백19억원어치)와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D사를 인수하려 했다. 이 같은 매각방식이 정해진 것은 해당 분야의 시장을 두고 H사와 D사가 지나친 경쟁을 벌여 서로 경영이 악화된 때문이었다.
D사는 자사를 매각하는 대신 모기업의 전자사업 분야를 강화하고, H사는 주력업종인 서비스업에 집중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별 문제없이 추진되던 이 매각작업은 사건이 터진 당일 오전 갑자기 H사가 인수포기를 선언함에 따라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H사는 이 같은 의사를 D사측에 공식 발표 하루 전날 밤 통보했다.
이 같은 H사의 매각 결렬의사를 전달받은 D사는 분통을 터트렸다. D사가 분통을 터트린 가장 큰 이유는 인수작업이 결렬된 것도 있었지만, 경쟁사인 H사가 인수를 하겠다며 D사의 모든 경영비밀을 알아내 버린 부분이었다. 처음부터 인수의사도 없으면서 경쟁사의 내부비밀을 파악한 게 아니냐는 불만이었다. 결국 이 같은 불만이 이날 저녁 일식집 주먹다짐을 불러온 것이었다.
이에 앞서 H사와 D사의 합병논의는 몇 차례 더 있었다. 당시에도 이 논의는 결렬됐었고, 그후 위기에 몰린 두 업체의 상황 때문에 2002년 초반에 인수합병 문제는 급물살을 탔었다. 당시 인수합병 문제에서 다소 약자의 위치에 처해 있던 D사로선 H사의 태도에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특히 D사는 투자액보다 낮은 값으로 파는 것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픈 상태였다. 당시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D사측은 매각작업이 성사될 경우 투자자산처분손실 규모가 약 4백66억원인 것으로 추정됐다. 그렇지만 D사로선 그런 손실을 떠안고라도 매각을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사실 D사로선 회사를 그대로 둘 경우 손실이 계속 커져 다른 계열사까지 위기를 맞는 도미노현상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따라서 D사측은 어떡하든 회사를 팔아야 했기에 매각협상에서도 H사측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형편이었다.
잘 되는 듯하던 D사의 매각작업이 갑자기 중단된 것은 H사측의 속사정 때문이었다. 경쟁사를 인수해 몸집을 불려야 할 필요성이 컸던 H사이지만, 단기적인 자금부담이 커 부득이 인수를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H사측은 D사 인수협상 포기선언을 하면서 D사에 대한 실사결과 인수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발표한 것이 D사를 자극했다. 이에 대해 D사측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인수에 따른 시너지효과가 6천6백억원이라고 발표했던 H사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며 발끈했다.
특히 D사측은 H사가 자사 인수를 포기한 원인이 H사의 전문경영인인 S회장이 자신의 거취가 불안해지는 것을 우려해 인수협상을 무효화했다는 주장을 폈다. 실제로 당시 H사는 경쟁사인 D사를 인수한 뒤 미국계 투자회사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받을 생각이었으나, 미국계 펀드측이 H사의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S회장을 포함한 경영진의 전원 퇴진을 요구하고 나서 H사측이 반발했다. 따라서 H사로선 D사를 인수할 경우 예정대로 미국계 펀드의 투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S회장 등이 자신들의 거취가 불안해질 것이 두려워 D사 인수 자체를 포기하게 된 것이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