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해피엔드>. |
서울강북경찰서는 정 아무개 씨(37)에 대해 1년6개월가량 수사를 벌여왔다. 교통사고로 아내와 자식을 잃은 정 씨가 억대의 보험금을 노려 고의로 사고를 낸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교통사고 현장에는 사고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을뿐더러 사고 발생 10일 전과 일주일 전 정 씨는 아내 앞으로 모두 11억 원의 생명보험을 들어둔 것으로 드러났다.
또 사건 직전 정 씨는 내연관계의 여성 A 씨를 만난 것으로 드러나 더욱 의심을 사고 있다. 현재 정 씨는 혐의내용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우연으로 보기엔 시나리오가 너무 완벽하다”며 지난 1년 반 동안 정 씨와 쫓고 쫓기는 싸움을 계속해왔다.
2009년 3월경 강북경찰서에는 ‘정 씨가 억대의 보험금을 노리고 고의로 교통사고를 낸 후 아내와 딸 둘을 사망케 한 것으로 보인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자는 정 씨가 일주일 전에 아내 앞으로 생명보험을 가입한 S 보험사였다. S 보험사는 혐의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고 당시의 현장 사진과 핸들의 방향, 타이어의 자국 등을 증거자료로 첨부했다.
보험사의 주장은 ‘사고라 하기엔 고의성이 의심되는 정황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사건 의뢰를 요청받은 강북경찰서 강력팀은 내부수사를 시작했다. 특히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가장이라고 보기엔 정 씨의 행각은 수상한 점이 많았다. 정 씨는 사고발생 두 달 후 퇴원했고 수원에 위치한 내연녀의 집에서 동거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전 가족들과 살고 있던 집은 이미 처분한 후였다.
정 씨의 행각이 수상하다고 느낀 경찰은 그를 즉시 소환했지만 정 씨는 경찰조사에서 “평소 부부금실은 좋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고의로 살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집을 처분한 것은 “아픈 기억을 조금이라도 빨리 잊기 위해서였다”고 진술했다. 그의 지갑에는 사별한 두 딸과 아내가 아닌 동거 중인 내연녀와 그 자녀들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정 씨는 이에 대해서도 “바라보면 마음이 아파 두 딸의 사진은 물론 아내 B 씨가 쓰던 물건까지 모두 불태웠다”고 진술했다.
그럼에도 그의 행각이 무언가를 감추려한다는 느낌을 받은 경찰은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에 주력했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정 씨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 씨와 다른 진술을 확보했다. 동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정 씨는 정화조 시공 일을 하며 한 달에 100만 원가량을 버는 일용직 근로자였다. 남편 정 씨의 수입이 불안정하고 적다보니 아내 B 씨는 식당 종업원 일을 하면서 두 딸의 교육비 및 생활비를 보태야 했다. B 씨와 함께 일해 온 동료 종업원들은 경찰조사에서 B 씨가 늘 생활고에 허덕이면서 자녀들의 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을 찾아 다녔다고 했다.
이러한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정 씨는 대출로 새 차를 구입해 자랑하거나 한껏 멋을 내고 외출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돼 마을 주민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 씨가 자신에게 내연녀가 있다며 B 씨에게 갑작스레 이혼을 요구하며 폭행을 했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기도 했다.
사건이 발생한 하루 전날인 1월 26일 B 씨는 친정에 간다며 오랜만에 밝은 표정으로 음식점 일을 쉬었다. 남편 정 씨가 웬일인지 명절 때도 가지 않던 처가댁을 방문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고향 친구들을 만나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풀라는 것이 정 씨의 제안이었다.
B 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정 씨와 두 딸과 함께 강원도 인제에 있는 처가를 방문했다. 도착 후엔 고향 친구들을 만나겠다고 집을 나섰다. 정 씨는 약속장소까지 태워다 주겠다며 함께 이동했다. 이날 B 씨와 만난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 씨는 B 씨에게 “PC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친구들과 마음껏 놀고 끝나면 연락해라”고 말하는 등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 씨는 B 씨를 내려준 후 곧장 내연녀 A 씨가 살고 있는 수원으로 차를 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내연녀 A 씨의 집을 방문한 정 씨는 “곧 이혼 한다”며 계속해서 A 씨를 설득했다. A 씨는 최근 이혼남으로 알고 있었던 정 씨가 사실은 딸이 둘이나 있는 유부남이란 사실을 눈치 채고 “헤어지자”고 통보한 터였다. 이런 A 씨를 설득하기 위해 정 씨는 물심양면으로 노력했고, 이날도 내연녀의 집에서 이런 내용의 대화를 나눴다.
2~3시간 후 수원에서 간신히 다시 인제로 돌아온 정 씨는 아내에게 “읍내에 있다 길눈이 어두워 헤매다가 늦었다”고 둘러댔다. 다음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가게 된 가족들은 경기도 양평에서 인적이 드문 도로를 달리던 중 사고를 당했다. 정 씨의 차는 도로 축대벽을 들이받아 조수석이 완전히 함몰됐다. 조수석에 있던 아내는 즉사했고 두 딸은 정 씨와 함께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정 씨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에 꺾었던 핸들 때문이었다. 축대벽에 부딪치려는 찰나 정 씨는 벽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정 씨가 핸들을 꺾은 방향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패턴과는 반대방향이었다. 보통 부딪치려는 장애물의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대해 정 씨는 경찰조사에서 “졸음운전을 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지만 정 씨가 가입한 것으로 알려진 두 보험사 측의 주장은 그의 고의성을 의심하고 있다. S 보험사는 “정 씨가 사고 일주일 전 보험가입을 신청하며 ‘친구가 차를 타고 가다가 졸음운전을 하는 바람에 타고 있던 아내가 죽었는데 보험금 지급이 가능하냐’며 사건내용을 미리 문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간접적인 정황이 발견됐지만 정 씨는 끝까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사고사를 부인하고 있다.
결국 강북경찰서에서는 정 씨를 국립과학수사대에 요청해 거짓말탐지조사를 벌였고 조사결과 사고 당시에 대해 진술하는 그의 발언이 ‘거짓’임이 판명 났다. 그는 당시 “모든 것을 고백하겠다. 담배를 달라”며 눈물을 쏟은 후 곧이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론 못난 내가 죽인 것이 아니겠냐”는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상황을 피해갔다. 계속되는 경찰의 수사로 간접적인 정황들이 속속 드러났지만 정 씨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특히 경찰이 결정적인 단서로 내연녀 A 씨와의 관계를 추궁했지만 정 씨는 “처, 자식을 잃은 내 사정이 딱해 A 씨가 돌봐주고 있는 것뿐이다”며 계속해서 동거 관계를 유지하는 대담함도 보였다.
8월 19일 기자와 통화한 강북경찰서 관계자는 “결정적 물증을 찾지 못했지만 주변 정황은 너무나 확실하다”며 “어제(8월 18일) 서울북부지검에 이 사건을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상황이다. 검찰이 정 씨의 자백이나 증거를 확보하길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에서도 직접적인 증거가 확보되지 않을 경우 정 씨는 아내 앞으로 신청한 생명보험 11억 원과 함께 두 딸에 대한 보상금까지 모두 14억 원을 손에 쥘 수 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