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의 대저택은 풀(pool) 등 호화시설에 경호원과 종업원이 40명에 달하고, 헬리콥터로 사무실에 출근한다고 한다. 식사는 밖에 나가 먹지 않고 사무실내 식당에서 먹는다. 실제보다는 조금 더 과장해서, 마치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들에게 비치는 것을 좋아하는, 소위 목에 힘을 주는 타입이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간다. 사마란치가 생전에 “만약에 마리오가 IOC 위원장이 된다면 그날이 IOC가 망하는 날”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의 등살에 못 이겨 사마란치는 네비올로에 이어 마리오도 IOC 위원을 시키려고 ASOIF 회장과 ANOC 회장만은 올림픽가족(Olympic Family)의 단결을 위해 예외적으로 당연직 IOC 위원으로 하자고 몇 년을 두고 IOC 위원들에게 간청을 했다. 결국 사마란치는 1991년 버밍엄(Birmingham) 총회에서, 마리오를 위해 측근들을 통해 사전작업을 해놓고도 표가 안 나올까봐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공개거수투표를 시키는 등 무리수를 두어 마리오를 IOC 위원으로 만들었다. 그런 막무가내식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마란치는 거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솔트레이크(SALT LAKE) 사건을 일으켜 미상하원 청문회에도 불려나가 망신을 당하는 등 고생을 한 것이다.
이때 멕시코에는 이미 2명의 IOC 위원이 있었고 IOC헌장을 적용할 경우 그 이상은 불가능할 때였다. 마리오 문제는 앤 공주(영국), 윌슨 위원(뉴질랜드) 등 영미계통이 앞서서 반대했지만 사마란치의 독단적인 안건처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를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10월 필자가 대한체육회 부회장,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로 있을 때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러 스위스 수도 베른(Bern)에 갔을 때다.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라 해도 이제 겨우 창설해서 아직 공인을 받지 못한 임의단체로 아무도 국제연맹 취급을 안 해줄 때였다. 사격연맹 회장 박종규가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경호실장을 사임하고 근신하고 있어 필자에게 대신 가달라고 사정을 해왔다. 별로 내키지 않아 사양했지만 간청에 못 이겨 ‘이길 자신은 없다’고 전제하고 서재관 사격연맹부 회장, 정진우 영화감독, 박갑철 기자(조선일보), 신용석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이끌고 갔다. 박종규 지시로 신용석은 사전에 로비를 위해 20여개국을 돌았었다. 이때 한국은 경제가 아주 나빴고 학생 소요도 많을 때였다. 마리오는 이때 멕시코 올림픽 위원장이며 사격연맹 회장이었고 부럽게도 부부동반으로 와서 세계사격연맹 간부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등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때만 해도 멕시코는 1968년에 이미 올림픽을 치른 스포츠 선진국이었다.
베른(Bern)의 IPU 즉, 국제우편연합 건물(국제법 시간에나 들은 이름)에서 총회가 있었고, 제안 설명은 마리오가 멕시코를 대표해서 먼저 스페인어로 했다. 아주 고답적으로 ‘멕시코는 팬암게임, 올림픽게임을 치렀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멕시코의 환대는 알 것 아니냐’고 하면서 선수 숙식비도 일당 10달러로 한다고 물량 공세로 나왔다. 필자는 한 8~9달러 정도 부르려다가 그것으로는 도저히 못 이길 것 같아 1억~2억 원 더 쓰더라도 이기는 것이 득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독단적으로 “우리는 하루 숙식(Room&Board)을 5달러에 한다”고 제안했다. 질문에 어느 나라 돈이냐 하기에 마리오도 미화 10달러, 나도 미화 5달러라고 다시 강조했다. 결국 오찬 후에 열린 표결에서 기적적으로 한국이 62 대 40으로 이겨 1978년 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서울로 가져오게 됐다. 이때 마리오 등 멕시코 대표단은 인근 호수(Thun See)의 선상 파티에서 술만 잔뜩 퍼마시는 것을 보았고, 그 후 멕시코는 사격대회 유치를 다시 신청하지 않았다. 이 세계사격대회의 서울 유치를 영국의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 대기자는 그의 저서 <올림픽 혁명>과 <IOC 100년 공식역사>에서 동북아 정치 지정학적 지각변동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와 필자의 모습(위)과 1987년 9월 17일 열린 IOC본부의 서울올림픽초정장 발송식. |
마리오는 바덴바덴에서 아디다스(Adidas)사의 다슬러(Dassler) 회장 등과 함께 막판에 ‘친한(親韓)’으로 기울었고(투표권은 없었다), 서울 올림픽준비 기간 중 노태우 위원장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IOC에 눌려 특별한 역할은 별로 없었다. 다만 1986년 롯데호텔에서 ANOC총회를 열 때 각국 NOC 수장이 대거 방한해 서울을 볼 기회가 있었다. 이때 한국은 참가인원 전원에 숙박비와 항공료를 지급했다. 그런데 마리오는 항공비는 멕시코에서 낼 테니 65만 달러(항공료 지원비)를 미국의 자기계좌로 보내달라고 해서 그렇게 지시한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당시 한국은 어떤 요구이든지 OK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약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이 UN방문에 이어 멕시코를 국빈방문했을 때는 특별히 자택에서 노태우 대통령 일행을 초청했고 필자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는 멕시코의 전직 대통령이 두 명이나 참석했다.
마리오는 여러 개 신문을 가지고 있어 세계 각국의 원수들을 인터뷰해서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또 늘 사진사가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만들어 주는 일은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 방문 전에 멕시코 전역에 신문으로 PR도 해주었다.
서울올림픽 준비기간 중 한 번은 사마란치가 마리오 전용기에 함께 동승해 방한하러 온다는 전갈이 왔다. 이에 사마란치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 확인을 해보니 ‘취침 중’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런데도 마리오의 전용기에서 사마란치가 타고 있다는 얘기가 계속 나왔다. 할 수 없이 서울올림픽조직위의 최고위층 전부가 공항에 나갔다. 전용기에서는 마리오와 동생 오레가리오(Olegario) 사격 회장이 내렸고 사마란치는 결국 오지 않았다. 안 나올 사람들이 모두 비행장에 마중 나오게 하는 마리오의 전문적 술책이었다.
서울올림픽은 IOC주관이었기에 마리오는 별로 역할도 없이 NOC 차원에서 움직였고, 1991년 무리수이기는 했지만 IOC 위원으로 입성한 후 점차 ANOC를 기반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또 네비올로는 사마란치에게 대들지만, 마리오는 아양을 떨면서 따라만 다녔다. 사라만치를 더없이 편하게 해준 것이다.
마리오와 다시 대면한 것은 1983년 팬암(Pan Am)게임 총회가 베네수엘라(Venezuela)의 수도 카라카스(Caracas)에서 있을 때였다. 이때 필자는 각국에 사범위주로 산재되어 있는 태권도를 NOC가 인정하는 공인협회로 승격시키고 올림픽을 향한 하나의 중요한 과정으로 대륙 경기에 넣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마침 서울올림픽 준비기간이라 서울에 오는 각국 지도자들을 국기원에 초청했다. 이때 코스타리카(Costa Rica),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아르헨티나(Argentina) 위원장들 특히, 미국 위원장단들을 통해 태권도의 팬암게임 정식종목 신청을 내게 했다. 그때는 예산도 없어 자비로 현지에 갔다.
ID카드도 옵저버 자격인 까닭에 간신히 참석해 뒤에서 공작할 때였다. 회의 막판에 태권도 문제가 상정되었는데 의장인 마리오가 태권도가 좋은 스포츠지만 팬암게임 종목이 너무 많아서 곤란하니 2년 후 쿠바총회에서 다시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안 넣겠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대해 코스타리카 등이 자국에 보급되어 있다고 발언하고 미국의 에비 데니스(Evie Dennis) 부위원장이 “그렇게 좋은 스포츠라면서 왜 2년을 연기하느냐? 지금 표결에 붙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제창, 3창을 거쳐 투표를 한 결과 찬성 22표, 반대 2표, 기권 2표로 태권도가 팬암게임의 정식종목이 됐다. 이때 마리오는 필자 보고 한 마디 하라고 해서 기분 나빠서 사양하다가 “앞으로 중남미 태권도 보급과 팬암게임 태권도 경기운영은 잘되도록 지원하겠다”고 역설했다. 이후 태권도는 1987년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 팬암대회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였고 필자도 참석했다. 그때 필자는 이미 IOC 위원이 되어 있었고, 미국태권도협회도 미국올림픽위원회 A급 회원이 된 까닭에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잉여금에서 100만 달러도 탄 바 있다.
마리오는 나에게 크게 두 번이나 패배를 맞보았지만 그것으로 원수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냥 넘어 가는 것이 스포츠계의 미덕이었고, 그 후 마리오와는 소위 사마란치 캠프의 일원으로서 우정을 쌓아 나갔다. 사마란치가 한 번은 마리오를 만나러 멕시코로 가라고 했다. 월드컵 축구 문제도 있고 하여 멕시코에 가서 이틀간 같이 세계 스포츠에 관한 여러 문제를 논의했다. 필자는 GAISF 회장이고 마리오는 ANOC 회장이었으니 올림픽 3대 지주 중 두 지주의 수장이 만난 것이다.
로게가 IOC 위원장이 된 후 마리오는 늘 꿈꾸어 오던 솔리다리티 위원장이 되었고 ANOC를 바탕으로 건재를 과시했다. 마리오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사마란치와 함께 한국의 날 행사에서 반갑게 만나 회포를 푼 바 있다. 마리오는 20세기 사마란치가 구축한 스포츠의 황금시대에 네비올로와는 대조적으로 각국 올림픽위원회 즉 ANOC를 통하는 측을 담당하며 지탱했다. 사마란치, 네비올로가 가고, 아벨란제(Havelange)가 은퇴한 이 마당에 이제는 유일한 라틴계의 강자로서 마리오만이 남아 있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