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해 보이는 애널리스트도 웬만한 실력과 체력 없이는 버티기 힘든 직업이라고 한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증권가. |
지난 5월 증권가에서는 ‘A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이 B 기업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화제였다. A 증권사의 한 애널리스트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 B 사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제시한 리포트 때문이었다. 리포트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랬다.
“△결론: B 사의 시장 대비 언더퍼폼(시장 평균 수익률 대비 하회)은 향후 1~2개월 더 이어질 것으로 판단 △이유: ① B 사를 배당주라고 말하기는 어려움 ② B 사를 성장주라고 말하기는 어려움 ③ B 사를 저평가주라고 말하기는 어려움 ④ 주가 상승 모멘텀(상승동력) 부재 △전략: 최근 주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상승 모멘텀이 부재하여 아직까지는 비중 확대에 나서기는 다소 이르다는 판단.”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두고서 한마디로 ‘봐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쓴 것이다.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다 보니 이를 본 B 사가 발끈한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아무리 부정적인 내용이라도 대개는 ‘펀더멘털은 양호하나 시장 컨센서스 부재로 당분간 매수세에 대한 예의 주시가 필요하다’ 정도로 배배 꼬아서 쓰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놓고 ‘너흰 글렀어’라고 했으니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B 사에서는 ‘앞으로 그 애널리스트 탐방 받지 마라’ ‘그 증권사 탐방을 아예 보이콧하라’ ‘그 증권사에 물량 주지 마라’며 엄포를 놓았다. 결국 리서치센터를 책임지고 있는 센터장이 B 사를 찾아 해명을 해야 했다.
그런데 다른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B 사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그 리서치센터장과 마주쳤다. 일상적인 탐방이 아닌 센터장의 출현에 궁금증을 느낀 그 애널리스트가 이유를 묻자 센터장은 사연을 설명하고 “빌러 왔다”고 대답했고, 애널리스트가 다시 “왜 안 들어가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리서치센터장은 “전화를 안 받아준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기업들에게 주식 발행은 이자도 없고 갚을 필요도 없는 자금원이기 때문에 주가에 민감하다. 애널리스트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시장을 분석해 냉철하게 의견을 제시한 것이지만 대기업은 증권사의 VIP 고객이기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국내 대부분 증권사의 리포트 중 ‘매도’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금융정보업체 FN가이드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 16일까지 제시된 증권사 투자 의견 1만 9205건 가운데 매도 의견은 하나도 없었다.
대기업보다 더 높은 ‘상전’은 자산운용사들의 펀드매니저들이다. 대기업은 회사 차원의 관리 대상이지만, 펀드매니저들은 애널리스트들의 직접 관리 대상이다. 애널리스트가 추천한 종목을 펀드매니저들이 사 줘야 시장 적중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매니저들이 옳다구나 하고 애널리스트 추천 종목의 비중을 높이진 않을 것이다. 일종의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이를 두고 ‘로비’라고 표현했다. 기자가 오히려 “로비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으니 관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자는 대화 내내 줄곧 ‘로비’라는 말을 사용했다. “일상적인 관리가 아니라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로비”라는 이유에서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애널리스트가 추천한 종목을 매니저들이 사 주는 것이 애널리스트의 명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불철주야 회사를 위해 뛰는 데다 증권사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애널리스트라면 회사 내에서는 상당히 대접받는 위치에 있을 것으로 예단하기 쉽다. 그런데 거꾸로 고학력·고연봉의 애널리스트들이다 보니 이를 통제하기 위해 ‘돈줄’을 다른 부서가 잡고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놨다. 거의 모든 증권사에서 리서치센터의 예산은 각 영업부서가 갹출하는 특별회계로 구성돼 있다. 홀세일(법인영업부·해외영업부), 리테일(개인고객·상품개발·각 지점) 부문의 각 부서들에서 리서치센터를 활용하는 비중만큼 비용을 댄다. 영업부서에서 요구하는 서비스를 원활히 제공해야 리서치센터가 풍족해질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자산운용사보다 덩치가 훨씬 작은 투자자문사조차 애널리스트들에게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 각 언론사에서 선정하는 ‘베스트 애널리스트’는 자산운용사·투자자문사들부터 투표를 받는 방식이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클라이언트들로부터 직접 평가를 받는 것이다 보니 인사고과에서 중요한 잣대가 될 수밖에 없다. 자문사들조차 ‘갑’ 행세를 하고 나서자 한 애널리스트는 “자문사에서 몇 표를 투표하는지 숫자를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고 언론사에 민원을 제기할 정도다.
애널리스트들의 출근 시간은 대개 오전 7시~7시 30분이다. 8시부터 시작하는 영업부서와의 미팅에서 그날의 이슈·전망 등을 제시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영업사원들이 클라이언트들을 만나면 애널리스트를 대신해 최근 동향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최근에는 영업사원이 애널리스트와 동석하는 자리도 많아지고 있다. 영업부에서 콜을 하면 애널리스트들도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야간에 술자리가 이어지다 보면 새벽 1~2시를 넘어 귀가하기 십상이다. 주중에 덩달아 영업을 뛰다 보니 애널리스트 본연의 임무인 리포트 작성은 주말로 미뤄지기 일쑤다. 대개 주말에 이틀 중 하루는 출근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처럼 ‘을’의 입장에 지친 애널리스트들은 앞서 나온 대기업 자산관리부서, 자산운용사로 옮기거나 투자자문사를 차리는 꿈을 꾸고 있기도 하다. ‘을’로서 이름을 드높여 보다 편안한 ‘갑’의 자리로 옮기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갑’의 위치라고 해서 무작정 업무만족도가 높은 것 또한 아니다. ‘슈퍼 갑’인 고객의 돈을 굴리면서 실적을 내지 못할 때의 스트레스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반면 애널리스트는 실적 압박이 없기 때문에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한 애널리스트는 일의 보람에 대해 “기업들을 분석하고 전망을 제시해 업계가 따라와 주고 나 자신을 전문가로 인정해줄 때 느끼는 희열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인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