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뢰 사건과 관련, 경찰 조사를 피해 잠적했던 오현섭 전 전남 여수시장이 지난 8월 18일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청에 자진출두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른바 ‘오현섭 리스트’에 올라있는 인물들은 수사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검찰 일각에서는 이번 오 전 시장 관련 비리 사건이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검찰이 뽑아들 비장의 카드라는 말마저 나돌고 있다. 호남발 ‘박연차 게이트’ 사건으로 확전될 조짐이 일고 있는 오 전 시장 뇌물 수수 사건의 후폭풍을 들여다봤다.
현재 오현섭 전 여수시장은 지난해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여수시청 간부 김 아무개 씨(구속)를 통해 야간경관 조명사업 시공업체로부터 1억 원씩 모두 2억 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여수시에 조성한 이순신 광장 조성사업 건설업체로부터 2007년부터 8억 원을 받아 챙긴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은 오 전 시장이 이 돈을 지방선거 공천과정에서 중앙당에 살포했거나, 혹은 지자체 유력 인사들에게 일정 부분 상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오 전 시장으로부터 7000만 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주승용 민주당 의원의 소환조사를 예고하며 정치권 수사의 신호탄을 이미 쏘아 올린 상태다.
주 의원은 “(오 전 시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반박하고 있지만 경찰은 혐의입증을 자신하고 있다. 같은 여수지역 국회의원인 김성곤 의원도 오 전 시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검찰과 경찰 주변에서는 주 의원은 이번 수사의 깃털에 불과하며 진짜 몸통은 따로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오래전부터 오 전 시장의 돈이 자신이 속한 당과 정치권 등에도 흘러들어갔다는 소문이 지역에 파다했다는 점은 사정당국의 칼끝을 함부로 예단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실제로 정치권 주변에서는 야당의 중진급 의원을 비롯해 오 전 시장에게 돈을 받은 국회의원들이 더 있다는 설이 나돌면서 이른바 ‘오현섭 리스트’까지 거론되고 있다.
지역 관계자 및 사정기관 등으로부터 입수한 ‘오현섭 리스트’를 살펴보면 일단 지난 6·2 지방선거 과정에서 호남지역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 거론되고 있다. 리스트에는 민주당 고위인사인 A 의원의 경우 사업을 하고 있는 동생을 통해 수억 원의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역시 당 중진인 B, C 의원 등도 최소 3억 원 이상을 뇌물로 받았다는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06년 지방선거 공천과정에서도 당시 당 실세였던 D 전 의원과 E, F 전 의원 등이 오 전 시장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중앙당 관계자뿐만 아니라 호남지역 자치단체 고위 관계자들에게도 오 전 시장이 정기적으로 뇌물을 상납했다는 의혹도 일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경찰수사 단계에서 정치권 유력 인사들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번 사건의 후폭풍은 경찰에서 수사한 건이 검찰로 이첩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불어 닥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지금껏 알려진 혐의 외에도 오 전 시장 재임 당시 이뤄졌던 100억 원 규모의 웅천생태터널 조성사업 등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9일 기자와 만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말한 ‘공정사회’의 의미를 잘 새겨봐야 한다. 청와대에서는 ‘공정’이 곧 ‘사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인사파동 등 현정권에 부담이 되는 사건들이 일단락되면 본격적인 사정 정국에 들어갈 것이다. 이를 대비해 검찰이 쥐고 있는 ‘패’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현섭 전 시장의 뇌물수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아마도 오는 10월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나는 시점에 중앙지검 특수 1부나 대검 중수부에서 직접 담당하게 될 것이다”고 귀띔해줬다. 현재 이 사건은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서울중앙지검 특수 3부의 지휘를 받아 사실상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소문만 무성한 금품살포설에 대해 수사기관이 어떻게 구체적인 혐의를 입증하느냐에 있다. 현재 오 전 시장을 수사하고 있는 수사팀 내부에서는 오 전 시장이 60일간의 도피 기간 동안 또 다른 비리를 감추는 동시에 드러난 비리건에 대해 증거인멸을 시도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민주당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폭풍전야다. 특히 오는 10월 있을 전당대회에도 이번 사건의 불똥이 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분위기다. 일부 당권 주자를 비롯해 당 중진들이 대거 ‘오현섭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당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호남발 ‘박연차 게이트’로 확전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과연 현 정권과 사정당국이 민주당 정치인들이 대거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꽃놀이패’를 어떻게 활용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
20년간 터 닦은 ‘호남의 마당발’
오현섭 전 여수시장은 경희대학교 법학과 4학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하며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국세청, 내무부 등에서 각각 7년간 중앙부처 생활을 하던 오 전 시장은 1986년 광주광역시 감사실 실장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호남지역 지방자치단체와 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광주광역시청에서 부이사관과 이사관을 거쳐 전남도 행정부지사(2002년)와 정무부지사(2003년)를 역임하기도 했다.
20년 가까이 호남 지자체에서 근무하며 지방 관계는 물론이고 정치권에도 폭넓은 인맥을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98년 광주광역시 기획관리실장 재직 당시에는 사전 입수한 주식투자정보를 이용, 2억 5000만 원의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으나 소송 끝에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2004년 공직을 떠난 오 전 시장은 2006년 지방선거 때 여수시장에 출사표를 내고 당선됐다. 그는 여수시장으로 재직하며 2012여수세계박람회를 유치하는 등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뤄내기도 했다. 순탄할 것으로 예상됐던 오 전 시장의 시장 재선은 지난 6·2 지방선거때 무소속 돌풍에 부딪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