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올해 추석선물로 선택한 8도 특산물. ‘지역화합’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국민정서에 반하는 고가의 선물도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명색이 대통령 부부가 보내는 선물인데 너무 값어치가 없어보여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청와대 측은 심사숙고해서 명절 선물을 선택한다. 선물에 대한 정치적 명분도 서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이번 추석 선물로 전국 8도 특산물 세트를 선택한 배경에는 ‘지역화합’과 ‘상생’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이처럼 역대 대통령들의 명절선물에는 당시 시대상황에 맞는 정치적 의미와 철학이 담겨 있었다. 과거 전직 대통령들의 추석 선물 속에 담긴 다양한 사연들을 들여다봤다.
3공화국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보낸 명절선물 인증’이 더욱 힘을 발휘했다. 박 전 대통령은 봉황문양이 새겨진 인삼이나 수삼을 즐겨 보냈다. 인삼을 담은 나무 상자에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문양을 새겼다고 해서 ‘봉황 인삼’이라고도 불렸다. 이 봉황 문양을 간직한 이들은 당대 ‘실세’로 인정받기도 했다. 서슬퍼런 군사독재 시절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봉황 문양이 새겨진 선물세트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정치적 의미가 투영돼 있었던 셈이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떡값’이란 명분으로 거액의 현금을 명절 선물로 돌렸다.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던 두 전직 대통령은 해마다 명절 때면 100만∼200만 원을 국회의원들에게 활동비 명목으로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진급 이상 핵심 인사들에게는 1000만 원이 훨씬 넘는 거액이 격려금으로 지급되기도 했다. 당시 ‘돈 선거’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기에 정치인들에게는 지역구 관리나 인맥관리를 위해 ‘현금 뭉치’만큼 실속있는 명절 선물은 없었다는 후문이다.
군사정권 시절만 해도 명절 선물을 받는 대상은 정치인과 특권층 등 소수에 불과했다. 정치인이나 군인처럼 대통령의 직접적인 관리대상이 된 인사들만이 특권을 누리듯 명절 선물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명절선물 문화가 확 바뀐 것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부터다. 선물은 현금이 아닌 현물로 대체됐고, 선물 속에는 대통령 나름의 정치적 철학과 의미를 담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은 물론 정치 입문 초기부터 부친이 고향에서 올려 보내는 거제도산 멸치를 줄기차게 명절선물로 선택했다. 야당시절에는 한해 3000상자, 여당 대표가 된 이후엔 대상자를 늘여 5000상자씩 추석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당시 선물에 ‘대통령의 고향에서 기른 멸치’라는 그럴듯한 수식어가 붙어 거제도산 멸치는 ‘대통령 멸치’로 불리며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의원 시절이 아닌 대통령 재임시절에도 특정지역 생산물만을 줄기차게 명절 선물로 보내는 것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선 부정적인 견해도 없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명절선물이 정치적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선물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김 전 대통령의 명절선물은 소박했다. 그가 보낸 추석선물 세트에는 서민들 사이에서도 자주 오고가는 김이나 한과, 녹차가 주류를 이뤘다. 김 전 대통령이 보낸 ‘김’ 선물의 경우 고향(전남 신안)에서 만든 특산물이었지만 녹차와 한과 등은 특정지역의 생산물을 고집하지 않았다. 선물을 받는 대상이나 구체적 인원 역시 대외비에 부쳤다. 당시 청와대 측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을 공개할 경우 받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게 될 서운함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명절선물과 관련해 보수언론으로부터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취임 후 첫 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아무 선물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가 당시 야권과 일부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얻어맞았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명절 때만 되면 국회 의원회관이 각종 선물 택배로 몸살을 앓았고, 자칫 명절선물이 ‘리베이트’ 내지는 ‘유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선물 근절’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야권과 일부 언론들은 국민정서에 반하는 독단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명절 때마다 안부인사와 함께 선물로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 한국의 전통인데 대통령이 이런 문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감을 표시해서야 되겠냐는 것이었다. 명절특수를 기대하는 관련업계 역시 노 전 대통령의 선택이 서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추석 때는 결국 고심 끝에 명절 선물을 골랐지만 선물을 받는 대상자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또 다시 구설에 올랐다. 당시 청와대 측이 집중호우 피해자와 소년소녀가장에게 차와 다기세트를 선물로 보냈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은 컨테이너나 임시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어떻게 편하게 차를 즐길 수 있겠느냐며 비꼬았다. 소년소녀가장 역시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힘든 상황인데 차와 다기세트가 그들에게 적절하느냐며 성토했다.
이에 따라 당시 청와대는 비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쌀과 생필품 등을 추석선물로 추가하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
노무현 전통주 ‘OK’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추석선물로 전통주를 자주 애용했다. |
노 전 대통령은 또 복분자주를 시작으로 국화주, 소곡주, 이강주, 문배술, 가야곡왕주, 송화백일주 등 지역 유명 민속주를 선물로 자주 애용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막걸리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대통령은 스스로 ‘막걸리 홍보팀장’이라고 말할 정도다. 자신이 주창하고 있는 ‘친서민’ 구호에도 구색이 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은 물론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명절선물로 막걸리를 선택한 적은 없다. 막걸리가 서민적이긴 하지만명절선물로는 적합지 않고 배달 중에 상할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