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일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을 방문, 추석물가 등에 대한 상인들의 의견을 듣고 제70차 국민경제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정부는 이상기온과 태풍으로 농산물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자 지난 2일 서민 물가 안정대책을 발표했다. 농축수산물 및 지방공공요금에 대한 안정화 대책과 경쟁 촉진, 가격정보 공개 등이 골자였다. 하지만 발표 직후부터 매년 나오던 정책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정부는 농축수산물 가격 안정을 위해 농축수산물 의무수입 물량 조기 도입, 가공식품 관세율 인하, 가격 상승 수산물의 공급 확대 등을 발표했지만 실제로 이는 해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다. 특히 이 정책들은 올해 초 저온 현상이 지속되면서 채소 작황이 큰 피해를 입고 가격이 뛰자 가격 안정화를 추진한다며 이미 발표했던 내용이다.
식량 자급률이 25% 이하이다 보니 의무 수입 물량 조기 도입과 가공식품 관세율 인하, 가격 상승 수산물 공급확대 등은 매번 만병통치약인 양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잔뜩 기대했던 서민들은 당연히 실망했고, 시장은 정부 정책과 거꾸로 흘렀다. 정부 정책 1주일 만에 배추와 상추 호박 등 채소는 10∼30%나 뛰었고, 과일과 수입산 쇠고기도 10% 가까이 상승한 것이다.
지방 공공요금 인하 정책도 실망을 안기기는 마찬가지였다. 매년 지방 공공요금 안정을 주장하지만 지방 공공요금은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결정하는 문제여서 통제가 불가능한 까닭에서다. 또 에너지 물가 안정을 위한 셀프주유소 등 저가 주유소 확산, 가격 표시판 개선 등도 이미 진행 중인 정책에 불과했다. 심지어 초당 통신요금제 확대는 이미 요금 경쟁에 들어간 각 통신사들이 앞 다퉈 시행 중이어서 정부가 내놓을 만한 정책은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정부 관계자는 “요즘 서민 생활에 부담을 줄 정도로 가격이 크게 오른 채소와 과일 등은 공산품처럼 마구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기본적으로 가격을 통제하기 힘들다. 배추는 저온성 작물이어서 요즘이 고랭지 상품이 나올 상황이지만 대관령의 올해 온도가 30℃를 넘나들면서 농가 표현으로 하면 ‘속이 완전히 익어버렸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가격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부가 마치 물가 안정책을 발표하면 서민 관련 물가를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기대를 부풀려놓는 바람에 역풍을 맞은 셈”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청와대가 친 서민을 강조하면서 정부 각 부처가 뭔가 새로운 친 서민 정책을 내놓아야하는 상황으로 몰렸지만 이미 1년 전부터 친 서민 정책들을 진행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정책들이 재탕 삼탕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실정”이라고 털어놨다.
정부가 지난 10일 야심차게 발표한 제2차 저출산 고령화 대책은 서민 물가 안정대책보다 더욱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1차 저출산 고령화 대책이 20조 원이나 쏟아 붓고도 사실상 실패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2차 저출산 대책마저 알맹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2차 저출산 고령화 대책 중 셋째자녀 보육료 전액 지원과 다자녀 추가 공제 확대, 농어촌 산부인과 설치, 근로시간 단축 청구권, 노인 틀니 건강보험 등 상당수 정책이 재탕 삼탕 정책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실제 셋째자녀 보육료 전액 지원이나 다자녀 추가 공제 확대는 이미 내년 세제개편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다. 농어촌 산부인과 설치 등도 이미 몇 해 전 정부에서 발표했지만 의사들을 유인할 만한 메리트가 없어 공전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신상진 한나라당 저출산대책 위원장마저 “정부가 발표한 92개 저출산 과제 중 신규 과제는 17개에 불과하다”면서 “백화점식 정책발표는 개선돼야 한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여기에 돈 없는 서민들이 아이를 낳게 하겠다며 새로 도입한 정책들은 서민에게 부담이 되거나 무책임한 정책이라는 지적마저 받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저출산 대책 중 서민들의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만 6세 이하 자녀를 둔 근로자의 육아휴직(최대 1년) 급여를 월 50만 원 정액에서 임금의 40%(100만 원 이내)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여성들의 경우 월급이 적고 휴가를 제대로 쓰기 힘든 비정규직 비율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육아휴직 급여를 정률제로 바꾼다고 해도 혜택이 늘어나는 여성은 많지 않다. 게다가 가장 자녀를 많이 낳는 전업주부는 이러한 혜택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대다수 여성은 혜택에서 소외되고 고소득 여성에게만 혜택이 집중되는 정책인 셈이다. 보육 교육비 전액 지원 대상을 2012년부터 소득하위 70%(4인 가구 기준 월 소득 436만 원) 이하로 늘리기로 했지만 이에 쓰이는 재정대책을 내놓지 않아서 겉만 그럴듯한 정책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재정 부담을 향후 정부에 떠넘기는 정책을 이번 발표에 넣어놨다는 것이다. 바로 2011년부터 태어나는 둘째아이들부터 고교 수업료(연 120만 원)와 국가장학금을 지원해주겠다는 제도다. 2011년에 태어나는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려면 앞으로 16년이나 지난 2027년이 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2012년에 물러나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정권이 서너 번 바뀌어야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정책이다.
아무런 재정 마련 방안도 없이 향후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주어질 만한 정책을 나중 정부에 안겨준 셈이다. 이런 정책은 또 있다. 공무원이 3자녀 이상 둘 경우 자녀 1인당 1년씩 최대 3년을 더 근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공무원들은 임금이 호봉제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오래 근무할수록 나중에 정부가 부담할 임금은 늘어나게 된다.
최근 저출산 고령화 대책에 대한 논의가 오고가면서 관련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고령화 대책은 꼼꼼하게 봐야 하지만 저출산 대책은 설렁설렁 마련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식의 농담 섞인 말이 돌았다. 고령화는 당장 쏟아지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기 때문에 효과도 바로 나타나고, 재정도 얼마가 들었는지 바로 보인다. 하지만 저출산의 경우 정책을 내놓아도 효과가 나타나려면 오래 걸리는 데다 향후에 시행될 정책이기 때문에 예산이 얼마나 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중앙부처 공무원은 “우스갯소리로 ‘이제부터 태어나는 아이들은 대학 등록금을 면제한다는 정책을 내놓아도 어차피 이 부담은 20년 후 들어설 정부가 안게 되니까 발표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었는데 이번에 발표한 정책 중 이것과 비슷한 고교 수업료 지원 정책이 들어가 놀랐다”고 말했다.
김서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