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개발사업이 LG CNS의 신규 출자자 참여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사진은 용산역 인근 전경.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지난 8월 19일 코레일이 다급하게 기자회견을 요청했다. 용산역세권개발 주간사인 삼성물산이 건설사 지급보증을 주도적으로 막는 등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경영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4조 5000억 원에 달하는 랜드마크빌딩을 매입하겠다는 깜짝 제안도 이어졌다.
이어 23일 코레일 및 드림허브의 금융출자사를 주축으로 이사회가 결의됐고 그로부터 일주일 지난 31일 삼성물산이 용산역세권개발(AMC)의 경영권 포기 선언을 하면서 용산국제업무지구를 둘러싼 소동은 일단락됐다. 이제 ‘삼성은 손 떼라’고 줄기차게 외쳤던 코레일의 주장대로 용산국제업무지구사업은 새판을 짜고 있다.
지난 13일 LG CNS가 500억 원 규모의 지급보증을 통해 5000억 사업을 수주하면서 용산국제업무지구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삼성이 빠지고 LG가 들어왔다는 모양새도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사업이 순항할 것이라는 코레일의 주장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 분위기다. 드림허브가 삼성이 빠지기 전부터 LG CNS와 물밑협상을 벌였다는 것은 업계에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대형 프로젝트파이낸싱(PF)사업을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외부변수들은 변한 것이 없다.
코레일 김흥성 대변인이 기자회견장에서 비유한 것처럼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은 뜨거운 감자다. 서울 최상의 요지에 들어서는 사상 최대의 개발사업인 만큼 군침이 흐른다. 그러나 국내외 부동산 시장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에서 수조 원의 빚(지급보증)을 져야 하는 이 사업에 곧바로 뛰어들기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전문가들은 삼성물산의 선택을 놓고 “역시 삼성”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겉으로는 삼성물산이 코레일의 공세에 밀려 사업권을 빼앗긴 것처럼 보이지만 철도시설이전공사와 토양오염정화사업 등 이미 수주한 4000억 원 규모의 공사와 앞으로 지분에 따라 확보할 5000억∼6000억 원 규모의 시공권까지 감안하면 챙길 건 다 챙겼다는 평가다.
삼성물산은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서는 모습으로 이미지 관리까지 성공했다. 명분 때문에 막대한 지급보증을 떠안는 대신 투자 지분에 따른 시공권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미래의 일감을 마련한 전략이 실리 위주의 삼성답다는 설명이다.
랜드마크빌딩은 연면적 31만 7000㎡, 매입가 4조 5000억 원에 달하는 초대형 건물이다. 매머드급 프라임 빌딩이 팔릴 정도로 경기가 좋아질 시기가 언제 올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지난해 출자사 간의 갈등이 본격화된 것도 당초 랜드마크빌딩을 매입키로 했던 아부다비 등 외국인 투자자가 매입을 보류하면서부터다.
불안한 장세를 반영하듯 건설업계는 ‘땅주인인 코레일이 신규 참여를 독려하고 있지만 대형 건설사들이 선뜻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코레일이 랜드마크빌딩을 매입해도 불투명한 전망과 지급보증에 대한 부담 등 사업구도 자체는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사업 참여를 조건으로 최소 1조 원대의 지급보증을 해야 하고 분양에 따라 공사비를 받는 ‘분양불 공사대금’ 구조는 여전히 불합리하다.
용산역세권 개발사업 시행사인 드림허브가 기존 출자사를 대상으로 이달 말까지 지분 매각 의사를 밝히라는 공문을 발송한 이후 건설투자사인 남광토건과 우미건설이 포기 의사를 밝히는 등 건설투자사들이 속속 발을 빼고 있다. 남광토건은 지난 6월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간 후 회사 경영난을 이유로 공공연히 지분매각 의사를 밝혀왔으며, 미분양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우미건설의 사업포기 역시 수순이었다. 이밖에 유진기업(0.4%) 반도건설(0.4%) 계룡건설(0.2%) 등도 지분 매각 여부를 저울질 중인 것으로 알려져 용산역세권 개발에서 발을 빼는 건설투자사들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돈도 없으면서 사업 동의서는 왜 받아갔어? 용산 때문에 나는 직장도 잃고 가족도 친구도 모두 잃게 생겼어.” 지난 19일 기자회견장, 서부이촌동의 한 주민은 들어와 이렇게 절규했다. 2006년 이후 만 4년을 끌어온 용산국제업무지구 최대 피해자는 코레일도 삼성물산도 아니다. 화려한 개발계획을 믿고 인근지역 부동산투자를 한 투자자들과 서부이촌동(이촌2동) 주민들이다.
최근 사업이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면서 사업대상지에 포함된 서부이촌0동 주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우체국 등 인근 공공기관이 철수하면서 이 지역 상가는 쥐죽은 듯 조용하다. 주민들 간에 개발 반대파와 찬성파 사이의 갈등으로 주먹다짐이 오가면서 이웃 간의 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파트 매매도 지난 2007년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뚝 끊겼다. 지난 2007년 8월 30일 이전 소유권자에게만 입주권이 부여되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1억 원 이상 싼 급매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다. 공인중개사 업계에서는 ‘서부이촌동 아파트 매물은 경매시장이 주거래시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서울시와 정부, 코레일이 이런 여러 난관을 뚫고 단군 이래 최대 사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지 주목된다.
김명지 파이낸셜뉴스 기자 mjkim@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