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순 국회부의장 일행이 미국회 방문 모습. 맨 왼쪽이 김정렬 대사, 오른쪽에서 두번 째가 머피 의원. |
6·25전쟁을 겪은 사람이라면 전쟁 발생 직후에 인민군의 야크(YAK) 전투기가 서울 상공에 날아 들어와 여의도 비행장을 급습, ‘탕탕’ 소리와 함께 채 모습도 갖추기 전인 한국 공군의 비행기를 모두 파괴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6월 26일 김포에 이어 6월 27일에 여의도 비행장을 공격한 것이다. 마침 필자도 27일 아침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김윤경 총장서리가 전교생을 소집해 휴교 선언을 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직접 새까만 야크 전투기가 여의도 공항을 급습하여 공격하는 소리를 들었다. 엄청난 굉음이었다.
한국은 6·25 발발 직전에 겨우 공군사관학교를 창립했고, 공군을 만들 장비가 없어 연습기 12대로 시작했다. 돈이 없어 국민성금을 모금해 연습기 10대를 사는 등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시쳇말로 하면 공군창설의 시늉을 내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이다. 참고로 시작은 이랬지만 미군이 본격적으로 가세하면서 전쟁기간 내내 제공권은 미국 공군이 완벽하게 장악했다. 오죽하면 ‘김일성이 쌕쌕이(F-86 세이버)가 없어 전쟁에 졌다’고 통곡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쌕쌕이는 ‘쌔액 쌔액’ 하고 날아다닌다고 해 붙여진 별명이다.
한국공군은 국군이 계속 후퇴하는 가운데 6월 28일 일본 규슈의 ‘이타즈께’기지에 조종사 10명을 보내 ‘F51’ 10대를 받아 7월 3일 한국에 도착했고, 다음 날인 4일에 출격했다. 그 후 공군은 대구, 서귀포, 사천 등지를 거쳐 강릉에 비행전대를 갖고 한국 전쟁 내내 출격을 거듭했다.
김정렬 총장은 공군사관학교를 창설하고 1949년 10월 공군이 독립되자 1952년까지 공군 초대참모총장을 지내고, 다시 1954년에서 56년까지 최용덕 참모총장의 뒤를 이어 다시 제3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육군항공대에서 공군창설까지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반대로 애를 먹기도 했지만 최용덕 국방차관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근대 공군 창설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이때 김정렬 총장이 쓴 ‘항공의 경종’은 미래전에 있어서 공군의 중요성과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말이 근사해 ‘공군 창설’이지, 사실 일본 및 중국군에서 항공대 경험이 있는 사람, 민간 항공회사에서 경험 있는 사람을 끌어 모아 육군항공대가 출범한 것이었다. 김정렬은 1948년 여수반란 때 연락기를 끌고 출동해 수송, 정찰, 통신 등에 힘을 보탠 바 있다. 6·25 발발 때는 연습기, 연락기 23대를 끌고 전쟁에 참가했다.
▲ 1군사령부 야전연습에서 훈시를 하는 김정렬 장군. 왼쪽이 필자. |
작전지휘권을 미군이 가지고 있고 군사원조로 한국군이 유지될 시절이었다. 당연히 한·미관계가 절대적이었다. 김정렬 장군은 한·미관계도 잘 다룰 수 있는 40대 장관으로서 각광을 받게 된다. ‘석교부도’라는 별명도 있었고 공군 조정사 기질도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위엄이 있고 멋있는 ‘젠틀맨’이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 후 공군사관학교에 그의 동상건립을 추진할 때 일본육군항공대 전력을 이유로 친일파라고 동산건립반대 대자보가 붙어 불발로 끝난 것이다.
김정렬 장군은 공군창설 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다. 참고로 국방장관 재임 기간 중 박정희 7사단장의 소장 진급이 무슨 이유였는지 이뤄지지 않았는데 그가 소장 진급을 거들어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종필이 외유를 떠나게 되자 공화당 초대의장으로 발탁도 되고 향후 주미대사, 국회의원, 국무총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 김정렬 국무총리가 서울올림픽 참가국기 게양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
이승만 대통령 하야 직후 허정 내각이 국방장관직을 물색할 때 김정렬 장군에게 군의 안정을 위해 맡아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본인은 “맞아 죽는다”고 극구 사양했다. 일전에 ‘송요찬 장군’ 및 ‘박정희 대통령’ 편에 잠깐씩 언급했지만 이승만 박사 하야 후 부산의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이 송요찬 총장에게 “4·19 후 인기가 올라가는 줄 알지만 나날이 내려가고 있으니 3·15 부정선거의 군 책임자로 사표를 내십시오”라는 과감한 편지를 보내왔고, 김정렬 장관은 그 후 가끔 필자에게 “그 편지를 본 사람은 당신과 나, 그리고 총장 이렇게 셋뿐이지?”라고 말하곤 했다. 김정렬 장관은 4·19가 이승만 대통령 하야로 끝났을 때 칩거에서 나와 경무대를 들르고 육군참모총장실에 격려 차 방문했다.
김정렬 장관의 회고록을 읽은 적 있다. 이에 따르면 이승만 박사의 하야성명 발표 직후 송요찬 참모총장을 만나고 있는데 전속부관 김운용이 하우즈(Howze) 군사고문단장 편지를 들고 들어왔고 곧 번역을 시켜 읽어 내려가는데 내용이 이상하고 ‘8군사령관에 의하여’라고 부기가 된 영어공문이었다 한다. 깜짝 놀랄 내용인 즉 ‘미국은 앞으로 송요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지원한다. 또 폭동진압을 위해 2개 사단을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송요찬 장군에게 두 번 물었더니 “아이고! 만고의 역적이 되게요”라고 두 번 하더란다. 그래서 매그루더 8군사령관을 만나 확인하니 국무성 의도라 해서 다시 W. P. 매카나기 대사를 만나 민간지도자가 정부의 수반이 되어야지 군인이 수반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여 민간 과도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도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필자는 그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당시 내용이 확실히 그랬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5·16 군사혁명을 거쳐 민정이양 과정에서 공화당이 창당됐다. 김정렬은 발기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전조직 등이 문제되어 김종필 당의장이 1차 외유를 떠나자 정구영 총재, 김정렬 의장으로 출범했다. 그리고 그는 1963년 5월에 정일권 후임으로 주미대사가 됐다. 군인 출신을 보냈는데 별명이 석교부도라 한국정부 입장에서는 마음 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예컨대 이때 외유 중이던 김종필을 미국을 거쳐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 전에 귀국을 시켜야 했는데 이게 여의치 않았다. 김정렬 대사를 비협조적 인사로 본 것이다. 사실 따지자면 워낙에 김정렬 대사가 나름대로의 파워를 갖고 있지 않았던 까닭에 어떻게 할 힘이 없었다. 9월에 김종필이 외유지인 파리에서 미국을 경유하러 뉴욕에 도착할 때는 김정렬과 필자가 한병기 영사(후에 캐나다 대사)와 마중을 나갔지만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김정렬 대사는 1964년 귀국해 1966년에 반공연맹 이사장, 그리고 67년에는 전국구 의원이 됐다. 필자가 주영대사관에 있을 때 차지철 일행과 해외공관 국정감사로 와 다시 만나기도 했다. 그 후 1971년에 전국구 의원을 사임하고 삼성물산 사장, 정우개발 회장을 역임했다. 삼성하고는 4·19 때 내무장관이던 홍진기가 경무대 앞 발포사건으로 5·16후 사형선고를 받게 될 위기에 처하자 김종필 정보부장을 찾아가(잘 모르는 관계였지만) 구명운동을 오후 내내 벌였다. 이때 김종필 정보부장은 아무리 졸라대도 ‘알았습니다’라고만 말했는데 그 다음날 선고를 들으니 ‘무기징역’으로 돼 있었다고 했다. 그러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또 김정렬 장군은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종용한 역할을 한 것을 계기로 전두환 정권에서 민주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공직에 복귀했고, 전두환 정권 말기에는 제5공화국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1987년 7월 14일~1988년 2월 24일).
김정렬 장군이 대한민국 공군의 창설과 근대화, 4·19 직후 미군에 의한 한국군의 잠정적 군정 권유에 대해 잠정적 과도 민정의 중요성 주장(?),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권고, 제5공화국 마지막 총리 등을 한국 현대사에서 나름대로 굵직한 몫을 한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요즘도 ‘돌다리와 묘탑(석교부도)’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그의 단호했던 표정이 새삼 눈앞에 아른거린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