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유 밀수사건 제보내용 일부. |
기자에게 전송된 제보자의 메일에는 A 업체의 범행 사실뿐만 아니라 공무원들의 연루 의혹도 적시돼 있었다. 혐의사실이 밝혀진다면 밀수를 도운 유통업체는 물론 국가기관으로까지 불똥이 튈 상황으로 보인다.
“세관과 감사원,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희대의 밀수사건’에 대해 제보했지만 구속은커녕 수사결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A 업체의 대표자 B 씨의 구체적인 범행 정황 및 관련자들을 소상히 기록했는데 흐지부지 끝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지방에서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는 익명의 제보자에게서 날아온 제보내용의 일부다. 익명의 제보자는 대전 지역의 한 업체가 지난 5년간 경유를 바이오유로 둔갑시켜 국내에 반입한 후 주유소 등지에 저가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백수십억 원의 부당이득을 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이오유의 관세(6.5%)가 경유(3%)보다 두 배가량 높지만 유류세(528.7원)가 부과되지 않기 때문에 바이오유로 둔갑시키면 경유를 훨씬 싸게 들여올 수 있다.
제보에 따르면 B 씨는 지난 5년 동안 싱가포르의 한 경유 생산 업체에서 경유를 대량 매입한 후 명칭을 바이오유로 바꿔 선박에 실었다. 바이오 연료의 경우 통관 절차에서 전수검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렇게 밀반입한 경유는 주유소 등에 판매됐고, 이 과정에서 교육세 및 교통세 등의 세금(1ℓ당 430원)을 내지 않아 B 씨는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B 씨는 경유 1ℓ로 약 1000원의 차익을 올린 셈이다. 리터당 경유 제조원가가 530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폭리다.
과연 그의 제보가 사실일까. 기자는 가장 먼저 신용장의 존재 여부를 확인해봤다. 대개의 경우 신용장을 작성해 거래 기록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보자는 해당 업체가 주유소 측과 짜고 신용장이 아닌 현금거래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주유소 측에서도 가격이 훨씬 싸기 때문에 현금거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제보자는 “3개월 전부터 이 같은 내용을 감사원, 세관, 권익위에 제보해 수사가 시작됐지만 최근 들어 B 씨는 오히려 인맥을 동원해 사건을 무마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한 뒤 자신이 제보한 기관과 사건 담당 검사에게 진행상황을 확인해보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제보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B 씨는 불법 수입으로 매년 거액을 탈세하고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이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외사부에서 세관을 통해 수사 지휘를 하고 있다. 10월 6일 사건 담당 검사와 연락이 닿았다. 담당 검사는 “세관에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세관의 증거만으로는 혐의 입증이 안 돼 두 달 이상 수사하고 있다. 제보자의 소재를 파악해 정확한 증거를 얻으라고 수사지휘를 내렸다. 그런데 증거를 못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10월 2일 압수한 물품에서 오히려 피의자의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가 나왔다. 제보자의 주장은 경유를 바이오유로 들여왔다는 것인데, A 업체 공장에 비축된 유류를 압수수색해 시료를 채취해 분석한 결과 바이오유가 나왔다. 혐의 입증 자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때문에 수사 석 달 만에 일단 참고인 조사 중지 지시를 내렸다. 그는 해외에 있는 수출업자가 귀국하면 참고인들을 불러 재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사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고 있는 관세청 관계자의 입장은 달랐다. 10월 8일 기자와 통화한 관세청 관계자는 “제보자로부터 같은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익명의 제보였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데다 혐의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까지 기술돼 있고 탈세 문제라 석 달가량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기자는 ‘제보자가 조언한 대로 A 업체 대표 B 씨와 수출업체 간의 통화내역조회, 직원 C 씨의 PC에 남아있는 거래 자료 및 기록 조회, 수출입을 담당한 선적 관계자 및 입항 조사, 주유소 측과 주고받은 무자료 매매 건 등에 대한 조사가 모두 이루어졌느냐’고 질문했다. 관세청 관계자는 “제보자 요청대로 모두 조사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났다. 그래서 증거자료를 첨부해 구속영장을 몇 차례 신청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때마다 검찰은 증거불충분으로 재수사 지시를 내렸다”고 전했다.
세관의 주장대로라면 수사시작 시점인 7월 말경부터 혐의를 입증할 만한 거래 기록 및 관계자들의 통화기록, 무자료 거래 건 등 증거자료를 확보했지만 계속해서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고, 급기야 그동안은 제출하지 못했던 반대 자료가 10월 2일자에 등장한 셈이다.
증거인멸 내지는 조작 가능성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담당검사는 “익명의 제보자 말만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피의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 수집에도 관심을 가져야 했다”고 말했다.
기자는 취재과정에서 또 다른 석연치 않은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10년 7월경까지 중앙지검 외사부 부장검사를 지낸 C 씨가 퇴직 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선임계를 내지 않은 상태로 A 업체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사건담당 검사는 지난 6일 “C 씨가 변호를 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며 “송치 단계 이전까지는 선임계를 내지 않고도 활동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B 씨는 이틀 후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C 변호사를 비롯한 몇몇 변호사에게 상담만 받다가 10월 7일 C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겼다”고 해명했다.
B 씨는 해외에 경유생산업체를 두고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후배들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아 설립했던 것뿐이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매각했다”고 전했다. 자신의 혐의에 대해선 “해외수출업체가 경유를 바이오유로 착각해 잘못 보낸 게 걸렸을 뿐이다”며 “악의적 제보 때문에 세관의 수사를 받고 있는데,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자료를 제출했는데도 세관에서 받아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관에서는 “A 업체가 직접 세관에 제출한 자료는 없다”며 “B 씨는 조사과정에서 회사내부자료, 이메일 등의 증거자료를 확보했을 당시엔 모른다고만 답했었다”고 일축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