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8월13일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됐다. 그러나 시행 전 이미 사채시장에는 5·6공 실세들 소유로 추측되는 수조원대의 유가증권이 쏟아져나와 헐값에 현금화됐다고 한다. 사진은 명동 사채시장으로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없음. | ||
1993년 3월 무렵의 일이다. 기자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 인사로부터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 인사는 정치권에도 교분이 많은, 당시로선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5·6공 시절 권력을 잡았던 인사들과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명동의 어느 카페에서 만난 이 인사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이유는 묻지 말고 대기업 총수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연결해달라.”
기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는 찬찬히 속에 감추어 둔 얘기를 풀어냈다.
“나에게 1천억원대의 CD(양도성 예금증서)와 채권 등이 있다. 당신이 믿을 수 있는 대기업 총수와 연결을 해주면 내가 가진 유가증권을 40~50%에 팔 수 있다. 대신 CD나 채권은 현금으로만 거래를 하려 한다.”
처음에 기자는 이 인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우선 당시만 해도 CD라는 금융상품은 그리 흔하지 않았을 뿐더러 채권 거래에 대해서도 기자는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더욱 궁금한 것은 이 인사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유가증권을 가지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물론 이 인사는 허풍을 떨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의문은 더욱 컸다. 특히 왜 이 인사가 유가증권을 허겁지겁 헐값에 팔려고 서두르는지도 궁금했다.
기자의 이 같은 궁금증을 눈치챘는지 그 인사는 “극비리에 일을 좀 추진해줘. 그리고 채권의 소유주에 대해서는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 같은 얘기를 전해들은 기자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 인사와 기자는 수 년 동안 호형호제하면서 지내온 터였지만, 그는 신분상 권력층과 아주 가까운 데다,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기자에게 그같은 말을 한 것은 물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 제안한 것이지만 기자는 두려웠다.
게다가 당시는 과거 정권 인사들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던 시기였고, 그 인사도 조사 대상에 들어 있었다.
어쨌든 기자는 그 인사에게 “나는 그럴 정도로 친분이 있는 대기업 총수도 없어서 도움을 주진 못할 것 같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그 인사는 “오늘 나눈 얘기는 모두 없던 것으로 해달라”고 당부하고는 헤어졌다.
▲ 지난 93년 실명제 실시 첫날 은행직원이 고객 신분증을 확인하고 있다. | ||
그로부터 며칠 뒤 기자는 명동 사채시장의 한 정보원에게서 흥미로운 얘기를 한가지 전해들었다. 며칠 전부터 출처불명의 채권들이 덤핑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액면가 5억원짜리 CD가 만기 두 달을 앞두고 40% 싸게 나온 것도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정보원이 알려준 명동의 한 사채업자를 만나긴 했지만 그는 이 사실을 부인했다.
기자는 퍼뜩 지난번에 만났던 그 인사가 떠올라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그 인사는 딴전을 피웠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유가증권을 팔지 않기로 했다는 것. 할 수 없이 기자는 명동을 중심으로 탐문 취재를 벌였다. 잘 하면 엄청난 특종기사를 잡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취재 결과 상당한 유가증권이 헐값에 명동을 중심으로 거래되고 있음은 직·간접적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그 유가증권이 어디서 유입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5·6공 시절 권력을 잡았던 세력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막연한 짐작만 했을 뿐이다. 더이상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어 결국 취재는 중단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는 그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잊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5개월쯤 뒤 당시 YS정부는 충격적인 경제개혁정책을 발표했다. 바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기자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융실명제 실시를 앞두고 누군가 자신의 유가증권을 현금화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었다. 다시 명동 사채시장을 찾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다. 나중에 한 사채업자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금융실명제 발표가 있기 6개월 전부터 수조원대의 유가증권이 헐값에 현금화됐다고 한다.
그러면 당시 유가증권을 대량으로 현금화한 주체는 누구였을까. 아직도 이 궁금증은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일이 벌어진 지 10년이나 흐른 지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재용씨의 재산을 둘러싼 검찰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당시 명동 사채업자들이 전한 내용에 의하면 헐값에 매물로 나온 채권의 종류를 보면 무기명인 CD가 주류였지만, 만기를 수년이나 앞둔 산업금융채권, 엑스포채권, 올림픽채권 등도 수천억원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실 산업금융채권이나 엑스포채권, 올림픽채권 등은 금융기관이나 정부가 발행하는 것이어서 아무나 쉽게 사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부분 은행이나 증권사, 투신사 등 금융회사들이 자금운용 차원에서 매입하는 상품인데다, 금리도 매우 높은 편이다. 금융기관에서 매입한 것이라면 굳이 헐값에 매각할 이유도 없거니와 사채시장을 통해 유통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IMF 때처럼 현금이 급하게 필요한 때도 아니었다.
따라서 사채시장에 쏟아진 유가증권들은 개인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고, 소유주는 로비나 청탁으로 받았으리란 짐작이 가능하다. 채권의 경우 대부분 무기명이어서 자산이 드러날 염려도 없었지만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 이름이 공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부랴부랴 덤핑매각에 나섰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최근 이뤄지고 있는 전두환씨 가족들에 대한 재산추적에서도 상당 부분 사채시장에서 단서가 잡혔다는 검찰 주변의 얘기를 들으면서 10년 전의 사건들이 다시 떠오른다.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