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포르노그래피는 1970년대 초에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이때 견인차 역할을 했던 세 편의 영화와 세 명의 배우가 있으니, 두 주 전에 소개한 <목구멍 깊숙이>(1972)의 린다 러블레이스, 지난주에 소개한 <녹색 문 뒤에서>(1972)의 마릴린 챔버스, 그리고 이번 주에 소개할 <데블 인 미스 존스>(1973)의 조지나 스펠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삼인방으로 인해 ‘포르노 시크’(Porno Chic), 즉 ‘세련된 포르노’의 시대는 완성되었으며 특히 조지나 스펠빈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연기력으로 각광받았다.
1936년에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미셸 그레이엄.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댄스 스쿨에 보냈고 회복이 된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댄서로 일하게 된다. 사실 그녀의 꿈은 오페라 가수였지만 성량이 부족했고 이후 발레리나로 진로를 수정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후 스펠빈은 “내 꿈은 좌절과 타협의 연속이었다”고 고백했다.
댈러스의 뮤지컬 팀에서 일하던 그녀는 뉴욕의 클럽으로 일자리를 옮겼고 이후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아가씨와 건달들> 같은 뮤지컬의 코러스 걸이 되었다. 당시 그녀는 나름 전도유망한 댄서였고 당대의 스타였던 셜리 맥클레인이 <달콤한 자비 Sweet Charity>(1969)라는 영화에 출연했을 땐 댄스 신의 대역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브로드웨이 뮤지컬 <파자마 게임>에선 주연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코올 중독이었고 곧 파산 상태에 이르러 집세를 내기 힘들 정도가 된다. 이때 우연히 신문에서 성인 영화의 배우 모집 광고를 보게 된 스펠빈은 호구지책을 위해 오디션에 참가한다. 20대 초반에 <트와일라잇 걸>(1957)이라는 소프트코어 레즈비언 영화에 잠깐 출연한 적은 있지만 ‘진짜 포르노’ 경험은 전무했던 그녀. 하지만 포르노 업계는 30대 중반의 여성을 배우로 등용할 만큼 너그럽지 않았고 한동안 그녀는 소프트코어 포르노 현장에서 온갖 잡일을 하며 생계를 해결했다.
이때 그녀는 해리 림스를 알게 된다. <목구멍 깊숙이>의 남자 주인공이었던 그는 이 영화의 감독인 제라드 다미아노에게 스펠빈을 소개했다. 사실 스펠빈의 역할은 현장의 식사 담당이었는데 어떤 ‘필’이 발동했는지 다미아노 감독은 그녀에게 시나리오를 한 번 읽어보라고 했다. 다른 포르노 배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연기 경험이 있는 그녀의 연기는 압도적이었다.
당시 다미아노 감독이 준비하고 있던 영화는 바로 <데블 인 미스 존스>. 끓어오르는 성욕을 풀지 못하고 자살한 미스 존스가 저승에서 다양한 성적 경험을 통해 극도의 희열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스펠빈의 연기를 본 감독은 19세의 가슴 풍만한 섹시녀로 설정되어 있던 미스 존스를 36세의 평범한 가정주부로 바꾸었다.
여성의 성욕이 절정에 달한다는 30대 중반의 포르노 배우는 정말 거칠 것이 없었고,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이후 그녀는 100여 편의 포르노에 출연했고 1982년 47세의 나이에 은퇴한 뒤 알코올 중독자 갱생원에 들어갔다. <데블 인 미스 존스>에서 레즈비언 섹스를 나눈 클레어 루미네어와는 한동안 실제로 동성애 파트너 관계를 가지기도. 포르노계에서 은퇴한 후엔 상업영화에도 진출했는데 대표작은 <폴리스 아카데미>(1984).
은퇴 후 데스크톱 출판과 그래픽 디자인 일을 하던 그녀는 2004년에 <데블 인 미스 존스>를 리메이크한 <뉴 데블 인 미스 존스>에 카메오로 출연했고, 2008년엔 자서전인 <악마가 그것을 하게 했다>를 직접 편집해 출간했다. 평범한 외모였지만 어떠한 역할도 가능한 마스크와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주었던 그녀. 한편 조지나 스펠빈이라는 예명은 미국의 연극계에서 익명처럼 사용하는, 한국으로 치면 ‘홍길동’ 같은 이름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