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오 특임 장관(왼쪽)과 박근혜 전 대표. |
문제는 정치권이 평온한 상태에서 개헌론이 불거진 것이 아니라 사정정국의 광풍 속에서 또 다시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번 대기업 수사의 칼끝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내려쳐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개헌론 논의도 사정광풍과 맞물려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개헌에 소극적인 친박계가 사정의 칼끝을 피해 개헌 논의의 장으로 불려갈 수 있고, 야당도 거세게 밀려오는 사정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여권과 개헌 협상에 나서며 숨고르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친이계 대권주자들도 개헌 공간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사정 태풍의 영향권 아래 흔들리고 있는 개헌론 정국의 이면을 따라가 봤다.
몇주 전까지만 해도 여의도 정치권에서 개헌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모호한 추진 주체, 가시적인 정치적 효과 미흡, 차기 주자들의 무관심 등으로 개헌론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소멸 직전이었다.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매개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대세론을 꺾어놓겠다던 친이계의 호기로운 주장도 옛말이 됐다.
청와대 내부 기류도 대체로 “더 이상 개헌추진은 무리”라는 것이었다. 여론조사에서도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찬반 입장은 3:7 정도로 부정적이다. 그래서 청와대에서도 “지금 여야에서 나오는 개헌론이 국민으로부터 추동력을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에 ‘공허한 테마’로 남을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현실화 가능성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추진 의지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반기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면 개헌이 자칫 모든 이슈를 잡아먹는 블랙홀이 될 수 있어 무리수를 두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친이계 내부에서조차 개헌에 대한 동력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은 ‘박근혜 대세론’과 무관치 않다. 갈수록 박근혜 대항마가 보이지 않고 ‘차기는 박근혜’라는 인식이 암묵적으로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개헌이라는 차기주자의 역린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기류가 친이계에 서서히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개헌에 대한 여권 권력핵심들의 시각에서도 드러난다. 정진석 정무수석은 취임 뒤 첫 작품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회동을 성사시켰을 정도로 친이계에서는 대표적 ‘친박’ 인사다. 임태희 대통령실장의 경우도 박 전 대표와의 상생을 주장하는 여권 내 비둘기파의 선두주자다. 이들은 모두 개헌에 대해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두 사람 모두 박근혜 전 대표라는 차기 주자의 위상과 경쟁력을 인정하고 여권도 이제 대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당연히 이들로서는 박 전 대표가 극히 소극적으로 대하는 개헌론을 들쑤실 필요가 없다. 특히 두 사람은 이명박 정권이 물러가도 다음 정권에서 공천을 받고 정치를 계속해야 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박 전 대표의 ‘개헌 역린’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인식이 강하고 그와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나가려는 성향이 짙은 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매스컴에 “개헌은 물 건너갔다”라는 청와대의 반응이 나오는 것도 정진석-임태희 라인에서 나오는 ‘언론 플레이’일 가능성이 있다. 최근 청와대 주변에서는 정 수석이 몇 명의 기자들에게 “개헌은 흘러간 옛 노래가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이재오 특임장관이 전해 듣고 불쾌해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개헌에 목숨을 건 이재오 특임장관은 상황이 이들 두 사람과 정반대다. 그에게는 차기 도모가 없다. 찍혀서 죽든지 아니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그와 입장이 조금 다르다. 이 대통령에게는 권력에 대한 미련이 없다. 박근혜 전 대표를 의식하지 않고 평소 소신대로 개헌을 밀어붙이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다. 이런 ‘이명박-이재오’ 간의 접점이 당내의 전반적인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재오 장관이 개헌을 소신 있게 밀어붙이는 동력이 된다. 일각에서는 “이 장관의 개헌 밀어붙이기가 이 대통령과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문제는 여권의 개헌 논의가 ‘박근혜 변수로 시작해 박근혜 변수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개헌론이 권력구조 개편 등 헌법의 업그레이드 접근이 아니라 당내 대권 구도를 둘러싼 정치공학적 차원의 접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데서 기인한다. 먼저 친이계조차 ‘물 건너 간 것’으로 여겨졌던 개헌론이 최근 다시 부상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1월 3일 ‘국회 중심론’을 언급하면서 개헌론이 다시 불붙고 있다. 이재오 장관, 안상수 대표, 김형오 전 국회의장, 정몽준 전 대표, 정태근 의원 등이 잇따라 개헌 불씨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 대통령과 ‘합창’으로 개헌론을 노래 부르는 시점이 묘하다. 현재는 검찰의 대기업 수사가 저인망식으로 총수들의 금고를 뒤진 후 서서히 그 칼날이 정치권으로 향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이다. 사실 개헌이 실제로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래도 개헌 합창이 나오는 것은 그 공간을 통해 박근혜 대세론을 어떻게 해서든 허물어보겠다는 의도 때문이다. 즉 최근의 개헌론은 ‘대세론’에 대한 친이계의 안쓰러운 ‘저항곡’인 셈이다.
여당의 한 고위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최근 이재오 장관의 측근 이군현 원내부대표가 민주당과의 4대강 빅딜을 제안했을 정도로 친이계 일부는 개헌에 목숨을 걸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실제 개헌이 아니다. 개헌정국을 통해 현재의 대권 구도를 흔들어놓겠다는 뜻이 더 강하다. 마침 사정정국이 몰아치고 있다. 현재 검찰의 정치인 사정은 그 끝이 어디일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개헌논의와 연계해 정무적인 판단도 있을 것이다. C&그룹과 관련해 야당 외에 여권 친박계 인사들의 연루 의혹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럴 경우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에 부담을 느낀 야당과 친박계가 개헌논의에 일단 뛰어드는 쪽으로 상황타개를 할 가능성이 있다. 일종의 타협이 진행되면 개헌론이 더욱 힘을 받을 것이고 검찰의 정치인 수사는 어느 정도 ‘마사지’가 되는 흐름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야당이나 친박계가 사정정국에 거세게 맞서며 정면 대립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친이계가 기대하는 개헌론 정국은 요원하게 된다. 이럴 경우 친이계가 개헌 정국 파기를 구실로 또 다른 특단의 수를 꺼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분당론도 나올 수 있다. 친이계로서는 박 전 대표에게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개헌이라는 점에서 개헌을 매개로 끝까지 박 전 대표를 물고 늘어지거나 저항할 것이다.
그래서 여권 일각에서는 “친이계가 탈당론과 신당창당론을 흘리며 박근혜 전 대표를 압박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시나리오도 나오고 있다. 어차피 친이계가 주장하는 개헌론은 개헌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개헌의 공론화 과정에서 나온 파열음을 동력으로 분당론과 함께 신당창당을 추진하는 제스처를 취할 경우 박 전 대표로서도 결별과 포용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재오 특임장관이 개헌에 유난히 집착하는 이유도 개헌론 논의를 주도해 향후 있을 정계개편에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는 사전 포석 성격이 강하다.
이밖에 검찰 대기업 수사와 연동되는 개헌론 정국은 이 대통령의 레임덕을 막는 수단인 동시에 연말 예산안 정국에서 야당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카드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여당의 대체적 기류는 친이계 일각의 개헌론 정국 기대를 ‘뜬구름 잡는 얘기’로 치부하고 있다. 여당 지도부와 친이계가 개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은 다분히 ‘시선 돌리기’ 성격이라는 것이다. 연말 정기국회에서 ‘4대강 격돌’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개헌과 사정 등 여러 수단을 총동원해 국민 관심을 분산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친이계가 주도했던 ‘세종시 정국’이나 ‘김태호 전 총리 후보자를 통한 세대교체’와 같은 정치적 이벤트는 모두 그 실체적 효과보다는 박근혜 대세론을 깨기 위한 공간 창출의 의도가 컸다. 개헌론(친이계가 원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의 국민 지지도는 6.2%에 머물러 있다-10월 27일 리얼미터 조사)도 박근혜 대세론을 깨기 위한 친이계의 페인트 모션에 불과할 뿐이다. 거기에 검찰의 대기업 수사는 친이계의 개헌론 슛 강도를 더 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과 함께 하지 않는 개헌론은 그들만의 리그로 친이계를 내몰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개헌론에 잠잠한 까닭도 이런 민심의 길목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가족사’ 아킬레스건 건들까
최근 소장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청와대에 근무하는 친이계 고위인사 K 씨 등과 회동하면서 ‘박근혜 잡기’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인사에 따르면 ‘조기 낙마론’은 친이계가 뚜렷한 대권주자를 내세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당을 박 전 대표가 완전히 장악하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황을 정리하고 대선에 보다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박 전 대표를 하루빨리 조기 낙마시켜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대선 후보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최근 박 전 대표가 4대강 사업과 감세 문제 등의 국가적 현안에 대해 입을 닫고 ‘부자 몸조심’을 하는 행보가 결국 대선에서의 패배를 부르는 안이한 대권전략이라는 지적도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 ‘조기 낙마론’도 여전히 친이계 일각의 유력한 카드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물론 이미 박 전 대표로 점점 고착화되고 있는 당내 대권 구도를 전면적으로 뒤흔들 기제가 없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 외에 아무런 카드도 쓰지 못하고 앉아서 당하지는 않겠다는 친이계의 저항 의지가 조기 낙마론으로 확대되고 있다. 앞서의 소장파 관계자는 박 전 대표의 조기낙마를 위해 ‘박정희 허상 깨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박근혜 신드롬’을 가져온 가장 큰 지렛대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이라는 것이다. 이를 정면으로 건드려 깨지 않고 개헌 등과 같은 지엽적 문제로 박 전 대표를 공격할 경우 그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친이계가 박 전 대표를 향해 이미 썼던 전략이다. 최태민 목사와 관련한 논란과 육영재단을 둘러싼 근령-지만 씨 간의 복잡한 갈등 관계가 박 전 대표의 자질론으로 이어져 유용한 공격소재로 사용됐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지만 씨 측과 근령 씨의 남편 신동욱 씨 간의 명예훼손을 둘러싼 법정공방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등 박 전 대표의 아킬레스건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친이계가 또 다시 그를 압박할 유용한 수단으로 이를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장녀로서 집안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이 리더십 거품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두 사람 간의 공방이라며 선을 긋고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박 전 대표의 가족문제 등 사생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과 “대선에서 그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불거질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정리하는 게 좋다”라는 견해가 충돌하고 있다. 친이계 일각의 ‘박근혜 조기 낙마론’은 현실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지만-근령 씨 간의 갈등이 ‘장녀’의 통제 불능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경우 대권 구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